못 배운 시어머니와 배운 며느리 간의 아름다운 사랑
못 배운 시어머니와 배운 며느리 간의 아름다운 사랑
2010년 2월 21일
김 일 중
( 다음의 아고라 토론방에 올린 글)
“아이고, 아저씨 반가워요”
“아, 임 양! 정말 반가와요, 미스터 송도 잘 계시지요?”
“ 결혼하고 바로 아이 하나 낳았는데, 이혼했어요. 송 아저씨는 이혼 후 미국으로 유학 갔어요. 소식을 전혀 몰라요”
“아! 그래요!”
“그런데, 아저씨, 내가 이혼했다고 하니, 내 동기생 남자들이 금새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나쁜 놈 들이예요”
위 대화는 내가 지금부터 35년 전, 학교 졸업 후 5년 만에 처음 만난 후배와 나눈 대화이다. 나의 대학 동기생 50명중에는 여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재학 중에 군대를 갔다 오니 여학생이 다섯이 있었다. 지금은 여학생이 나이 많은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그 때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저씨 선배는 후배를 김양, 이양 등으로 호칭했다.
위에서 말한 임 양이 철학과에 다니는, 나와 동갑내기인 경상도 출신 송 아저씨와 공개적으로 연애를 했다. 그 송 아저씨가 우리 과에 자주 놀러 와서 나는 그 송 아저씨와 친하게 지냈다. 임양과는 같은 클럽에서 활동을 해서 다른 후배들 보다는 친하게 지냈다.
임 양은 그의 아버지가 자유당 시절의 육군 3성 장군이었고, 송 아저씨의 아버지는 저 경상도 시골 농군이었다. 송 아저씨 집안은 참 가난하게 살았다. 그 당시에는 모두 가난하게 살았다.
내가 이글에서 쓰려고 하는 것은 앞서의 대화 때, 임 양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아고라에 학벌 높은 며느리 학벌 낮은 시부모 라는 주제를 놓고 떠들썩해서 이 글을 쓴다. 읽어 보면 학력차가 고부간의 갈등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혼한 임 양과 송 아저씨는 가난하게 살았다. 송 아저씨가 특수지 기자를 했는데, 급여가 말이 아니었다. 임 양은 시집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집올 때 가져온 놋대야와 놋요강을 팔아서 시어머니께 드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대학 나온 며느리의 못 배운 그리고 가난한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
어는 날 임 양이 시골 시어머니 댁에 갔다가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올라 왔다. 그 때 점심때가 되어 시어머니가 주신 꾸러미를 열어 보았다. 시어머니가 임 양의 점심으로 준비한 것이 말로만 듣던 보리개떡 이었다. 지금의 60대, 70대 사람들은 보리개떡 이라면 다들 안다. 사전을 찾아본다. 보리개떡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노깨, 나깨, 보릿겨 따위를 반죽하여 아무렇게나 반대기를 지어 찐 떡”으로. 노깨는 “메밀을 갈다 가루를 체에 쳐내고 남은 속껍질”, 나께는 “체로 쳐서 밀가루를 뇌고 남은 찌끼”라고 되어 있다. 반대기는 “가루를 반죽한 것이나 삶은 푸성귀 따위를 평평하고 둥글넓적하게 만든 조각"으로 나와 있다. 한 마디로 보리개떡은 밀가루로 만든 떡도 못 되는 맛없는 찐 떡이다. 개자가 들어간 것만 봐도 얼마나 맛없는 음식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임 양은 이 보리 깨떡을 먹으면서 한 없이 울었다. “애기야, 미안하다. 내 정성 이다”라고 말하던 시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정말로 많이 울었다. 시 어머니가 가엽고 불쌍하였다. 시어머니의 정성이 뼈가 저리도록 아프고 고마 왔다.
이 혼을 하고 임 양이 그녀가 나은 딸 (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다) 을 시집에 넘겨주려고 시골집을 갔다. 아이를 데리고 가니, 시어머니가 그녀의 아들, 송 아저씨를 붙들고 이 나뿐 놈아, 이 나뿐 놈아 네놈이 잘 되나 보자고 소리치고 몸부림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이혼을 한 임 양보다도 시어머니가 더 슬퍼하고 애통해 했다.
임 양이 아이를 시집에 넘기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시어머니 동네 마을 우물가에서 눈물을 닦고 세수를 했다. 이 때 롤렉스 금 딱지 시계를 그 우물가에 풀어 놓았다. 이 시계를 깜박 잊고 길을 떠났다. 우물에서 한 500미터 쯤 와서 잊고 온 시계가 생각났다. 임 양이 바로 그 우물가에 가면 시계를 찾을 수 있는데도 그냥 서울로 왔다. 지금도 그 시계는 비쌀 것이다. 1970년대에는 더 욱 값비싼 시계였다. 임 양은 가장 소중한 자식을 주고 온 것을 생각하니, 그 시계가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안 들었다.
“아저씨, 내 아이를 남에게 주고 나니, 세상 욕심이 없어지더라고요, 시어머니가 제 아이를 기른다고 해서 위로가 되었어요” 라던 임 양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권 기종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인간이 그의 욕심을 끊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절에 와서 무엇을 자꾸 달라고 한단다. 교회도 달라고 하는 것은 마찬 가지다. 인간의 욕심이니 탐욕이니 하는 말들을 들을 때는 나는 언제나 임 양의 그 말아 생각난다. 이혼 후 자기가 나은 자식을 시어머니에 주고 나니, 세상에 속한 욕심이 다 사라저 버리더라는 그 말이 생각난다.
송 아저씨의 어머니는 교육은 안 받았으나, 끔찍하게 며느리를 사랑했고, 대학 나온 임 양도 그 시어머니를 정말 사랑했다. 그 시어머니는 벌써 타계했을 것이다. 임 양과 송 아저씨의 그 딸은 이혼의 아픔을 헤치고 잘 자랐을까? 30대가 넘었을 것이고, 임 양도 60대를 넘어 머리가 반백이 되었을 것이다. 그 송 아저씨는 철학 박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도 백발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