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보수단체(11월25일) 시위 참관기(參觀記)
서울역 보수단체(11월25일) 시위 참관기(參觀記)
2016년 11월 28일 김 일 중 씀
(조갑제 닷컴 회원토론방에 쓴 글)
서울역 광장에서 오후 3시부터 열리는 보수단체의 시위에 참관하기 위해 2시 12분에 서울역에 도착, 그 곳을 떠나 광화문 시위 현장으로 갈 때까지 2시간 30분 동안 군중과 함께 구호도 외쳐보고, 연사들의 연설도 들어보았다. 역사 주변도 여기 저기 돌아 다녔다.
군중은 많다고 표현 할 수 없다. 적었다. 주최 측이 마련한 의자를 채울 수준이었다. 날씨도 춥고 진눈깨비가 내려 인원이 많을 수가 없었다. 경찰 추산은 1,000명이다. 여러 보수 단체가 참여한 모양인데, 내 눈에 보인 것은 ‘대한민국 박사모 중앙봉사단’ 뿐이었다. 연설을 위한 무대에는 “대통령 하야 반대 및 안보 지키기 국민 대회’ 라고 쓰여 있었다. TV 화면이 1개 설치되어 있었고 설치된 확성기도 적었다.
구호는 광화문 시위대의 그것과 정 반대의 것이었다. 하야(下野) 반대, 탄핵(彈劾) 반대, 박대통령 모함 하는 검찰관 구속 수사, 계엄 선포 등이었다. 집회는 인원이 적어서인지 오고 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역 주변을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노숙자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그 노숙자 주변에 비둘기들이 한가롭게 모이를 먹고 있었다. 역이 넓어서 그런지 확성기 소리가 안 들리는 곳에 이르면 소란하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경찰관들이 보였다.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들었다. 종종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광화문 시위와 다른 점이다. 그들의 함성은 힘이 들어있었다. 인원이 적으니 함성이 클 수는 없었으나 구호 색조(色調)는 진지하고 진했다. 광화문 시위대의 그것보다 열성은 더 뜨거웠다. 남편도 없고 자녀도 없고, 형제자매도 만나지 못하는 대통령의 외로운 처지에 하야의 압력을 받고 있는 그분의 처지를 정말 애처로워하였다. 하야를 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염원(念願)이 시위 군중의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시위 연단에 선 이들은 서경석, 신혜씩, 김한수, 이성민 등이었다. 그들의 연설은 길었다. 논리적이고 설득형 연설을 했다. 연사들이 논객(論客)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화문 시위대의 연단에 선 사람들은 구호적(口號的)이고 선동적이다. 광화문 시위대는 중학교 1학년 딸, 고등하교 2학년 아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즉 한 가족이 동시에 연단에 올라와서 짧게 구호하고 선동한다. 심지어 소까지 동원한다.
서경석 목사와 연설자는 원고를 보고 연설하였다. 휴대폰에 기록된 연설문을 보면서 그것을 읽었다. 그가 작성한 연설문을 조금만 노력하면 외울 수 있고 그러면 더 생동감 있고 더 힘 있고 더 감동적으로 연설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런 노력 없이 연설하였다. 처칠은 의회의 연설이 있으면 그가 직접 연설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다 외우고 반드시 리허설을 했다.
박사모란 말만 들었지 그 사람들을 이번 처음 보았다. 그들은 지금 비난의 대상이지 칭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박대통령을 사랑하고 지지한다. 나는 그것이 고마웠다. 그들이 박대통령으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서울역 시위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나 혼자 생각한 것이다.
서경석 목사가 연설 중 모금함을 들고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하면서 울먹울먹하였다. 잠시 울은 것 같다. 그는 애써 울음을 참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박대통령의 하야는 막아야 하겠고 좌파의 집권은 막아야 하겠는 데 총알도 없고 지지해주는 시위군중이 없어 몹시 안타까워했다.
나는 서(徐)목사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다. 일부러 가까이 가서 보았다. 1미터 안에서 보았다.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그 옆에서 이야기도 들었다. 목사인데 그 얼굴은 종교인 같지 않았다. 얼굴에는 근심 걱정 많은 정치인 같았다. 그가 입은 겉옷(오바)은 50년 전에 유행하던 그런 옷이었다. 그는 혹시 매우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25세 때 45세의 모택동(毛澤東)과 결혼 77세에 목을 매어 자살한 장칭(江靑)이란 여인을 우리는 안다. 그녀를 중국인은 측천무후(則天武后)라고 한다. 그녀는 그녀를 제거하려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모(毛) 주석(主席)의 개였소. 그가 물라고 하면 어디든지 가서 물었소. 혁명에는 죄가 없오” 라고. 그녀의 남편이자 혁명동지인 모택동에 대한 충성심을 이렇게 매우 잘 표현했다.
지금 박대통령의 처지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장칭처럼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 많던 우파 단체들은 어디로 갔나? 국민운동 행동본부는 왜 그렇게 잠잠한가? 소위 친박(親朴)이라고 하는 이들 중에 한국의 장칭을 자처하는 정치인은 한사람도 없나?
4시 40분에 광화문 시위를 참관하려고 서울 시청 광장으로 갔다. 신한은행 앞에 이르니 기아자동차라는 깃발을 든 젊은이들 200 여명이 줄을 지어 서울시청 광장으로 가면서 즐겁고 기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광장에 도착했다. 군중들이 와글와글 했다. 조금 전에 참관 했던 서울역 시위현장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