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칼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서

김일중 2017. 3. 6. 22:29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서

 (태극기 시위 집회 참여 수기(手記))

 2017년 3월 6일     김 일 중

                                                                                        (조갑제 닷컴이 모집한 수기에 응모한 글)

 

갈대 (판사)는 바람 (여론)에 흔들린다. 강(江)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판사)은 바람 (여론)에 그의 물줄기를 바꾸지 않는다. 세계사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강 같은 판사는 있었을까? 모든 기소와 재판은 언제나 공정했을까? 아니다. 그 반대였다. 특히 정치재판은 더욱 그러했다. 기소(起訴)와 판결은 당시의 최고 통치자의 의지와 바람에 좌우되었다. 지금 이 땅에서도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흔들리는 갈대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바람을 막아주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 바람을 막아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는 갈대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 그날도 지하철 서울역에 도착했다. 2017년 3월 1일이었다. 나의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2시부터 박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행사는 시작되었다. 그 날 지하도에 사람이 많았다. 지하도는 사람으로 꽉 찼다. 4번 출구로 나갔다. 출구가 인파로 막혀있었다.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내 뒤의 사람들이 나를 천천히 밀었다. 나도 내 앞의 사람들을 밀면서 간신히 지상에 나왔다. 인파(人波)란 이런 때를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일 것이다. 땅을 밟았다. 아! 아! 서울 시청 앞 광장과 대한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모였다. 태극기를 든 그렇게 많은 인파를 나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탄기국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대표 정광용)은 신문광고에서 500만 명의 애국시민에게 시위에 참여하라고 호소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시위현장에 와 있고 또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수많은 태극기, 성조기, 현수막들, 피켓들 그리고 깃발들이 보였다. 사람들과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든 광경이 아름다웠다. 장관이었다.

 

그날, 내가 태극기를 들고 열세 번째 시위에 참여한 그날, 내가 참여한 시위 중 가장 많은 시위 군중이 모인 그날, 시위 군중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그날, 남녀노소(男女老少) 가릴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몰려온 그날, 2017년 3월 1일 의 하늘은 어두웠다. 태양은 구름 뒤에 숨었다. 봄이었으나 바람이 차가왔다. 비가 올 듯했다. 그날 오후에 비가 오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17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집회가 있은 이래 태극기 시위는 회를 거듭할수록 계속 참여 시민이 늘었다. 처음의 7만 명이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주최 측 발표). 현장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과 초대형 확성기도 늘었다. 맨 처음 한 대에서 시작한 대형 확성기는 그날 까지 62대까지 늘었다. 이 거리 저 거리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도 늘었다. 시위 때마다 내가 눈여겨 본 깃발들은 깃발의 크기가 더 커졌다. 높이도 높아졌다. 그 수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증가하였다.

 

나는 지난 해 11월 19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새로운 한국을 만들기 위한 국민운동 (대표 서경석 목사)이 주도한 시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들었다. 그 이후 그날까지 (3월4일) 모두 탄기국과 자유통일 유권자 본부(대표 박성현)가 주최한 14회의 집회에서 내 손에 태극기를 들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기도 했다. 나는 드디어 3월 4일에는 가로 1m x 세로 60cm, 높이 2m의 큰 깃발도 들었다. 대전고등학교 제 40회 애국동지회의 깃발이 그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군모와 군복에 별 두 개를 단 육군 장군을 본 것은 1959년 5월 어느 날 아침에 나의 고등학교 교정에서였다. 그 때는 장군이 매우 귀해서 가까이서 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 장군이 그의 스승인 교장선생님을 찾아왔고, 그 교장선생님이 그를 우리에게 소개했고, 그가 우리들에게 연설했기 때문이다. 그 때의 그 장군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 장군이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그의 은사를 찾아온 그 장군이 박정희대통령이었던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알았다.

 

박대통령의 스승이었던 박관수(朴寬洙)(1897~1980) 교장선생님은 일주일에 딱 한 번 아침 조례를 했다. 아침 조회를 할 때는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들아, 내 평생소원은 내 제자 중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너희 중에서 내 소원을 이루어 줄 아이가 없을까? 너희들처럼 농촌에서 토끼들이 다니던 길에서 지게를 져 본 아이들이 대통령이 돼야 나라가 잘된다. 경기고등학교 출신보다는 너희들 중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박관수 교장선생님은 대구에서 박정희 소년을 가르쳤다. 내가 고교를 졸업하던 해 1961년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박정희 육군소장이 민선 대통령이 됐다.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나의 교장선생님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 교장선생님이 사랑했던 그의 제자는 대통령이 되었고, 그 교장선생님의 제자는 그의 스승의 소원을 이루었다.

 

내가 대전고등학교 40회 애국동지회의 깃발을 들었을 때, 나는 박관수, 박정희, 박근혜 그리고 나와의 사이에 얽힌 인연(因緣)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다. 나는 내가 흔드는 깃발에 박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을 달고 흔들었다. 나의 고교 동기생 셋도 고교 깃발을 흔들었다. 거기 어딘가에는 나의 후배 44기의 깃발도 흔들었을 것이다.

 

나는 태극기 시위대에 참여했을 때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현수막의 내용을 읽었다. 피켓도 살폈다.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그들의 주장이 쓰여 있다. 특히 깃발 든 사람들을 보고 그 깃발에 쓰인 단체의 이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위 참관기(參觀記)를 조갑제 닷컴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아홉 번이나 참관기를 썼다.

 

나는 1월 7일에 나는 대한문 앞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시위 현장에서 위국헌신(僞國獻身) 육사(陸士) 21기란 피켓을 발견했다. 육군사관학교 예비역 장교들이 시위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아마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위국헌신이란 말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다는 뜻이 아니냐? 조국을 위하고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도 바치겠다는 뜻이 아니냐? 그 피켓과 거기에 쓰인 네 글자는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나는 1월 14일의 시위 때에 육사 21기의 피켓을 찾아보았다. 그 기수와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피켓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육사 23기, 25기, 28기 등의 다른 기수들의 현수막과 깃발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나의 고교 후배들이 든 대전고 44회 애국동지회의 깃발을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육사 21기의 동기회장을 하고 있는 장군이 나의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2월 25일의 시위 현장에는 육사, 해사, 공사, ROTC, 해병대, 3사관학교, 육군간호사관학교 등 모든 예비역 장교들의 깃발이 나타났다. 고대, 연대 애국동지회의 깃발도 나타났다. 그날에는 고등학교 애국 동이지회의 깃발도 나타났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서울상고, 덕수상고 경북중고 등이 그것이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 밖의 대학과 고등학교의 깃발들이 시위 현장 여기저기에서 펄럭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 곳에서는 중학교, 초등학교의 깃발도 보였다.

 

이렇게 그 뒤를 이어 시위 현장에 나타난 각종 깃발들은 시위 현장을 장엄(莊嚴)하게 했다. 3월 1일과 3월 4일에 나타난 엄청난 깃발들은 태극기 세력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촛불 세력을 압도 했다. 국민들과 헌법 재판관들에게 촛불 세력만이 민심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했다. 3월 4일의 을지로의 하늘을 뒤덮은 육·해·공군 사관학교, ROTC, 해병대, 3사관학교 등의 모든 예비역 장교들의 애국동지회 깃발들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깃발들이 수가 많고 커서 하늘을 뒤덮었다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니었다.

 

유치환(1908~1967) 시인(詩人)은 1939년 이런 깃대에 꽂힌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깃발'이란 시(詩)를 썼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시인(詩人)이 이 시대에 살아서 오늘의 태극기 세력들이 흔들어 댄 그 깃발을 보았을 때에는 어떤 시를 썼을까? 유시인은 위 시에서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깃발에 달았다고 썼다. 나는 태극기와 성조기와 내 고교의 깃발에 어떤 마음과 염원을 달았고, 그 시위 현장에 나타난 그 애국 동포들은 어떤 소망을 달았을까? 나의 염원과 그들의 염원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 깃발에 탄핵이 기각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달았다. 자유민주주의, 반공, 시장경제체제, 한미 유대 강화, 조국의 통일이란 염원을 달았다. 제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아 나라를 망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을 달았다.

 

남미의 좌파통치로 베네수엘라의 국민들이 광장의 비둘기와 쥐를 잡아먹은 그런 일은 이 땅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깃발에 달고 시위 현장을 찾아다녔다. 김정은의 이북처럼 국민 모두가 깡통 차고 빌어먹는 그런 일은 이 땅에서는 없어야 한다는 염원을 내 깃발에 매달았다.

 

나는 성조기를 들었을 때는 그 깃발에 미국에 대한 감사를 달았다. 미국은 6·25 사변에 참전해서 54,000명이나 되는 젊은 군인을 잃고 100,000명이 넘는 군인들이 다치는 아픔을 겪었다. 이 나라를 지켜준 트루먼 대통령, 딘 애치슨 국무장관, 맥아더 장군, 리지웨이 장군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내가 시위를 하고 있는 그 바로 그 곳에 지금 인민공화국의 기가 펄럭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린다. 그러나 태극기 시위 현장에서 애국 시민들이 흔들어 댄 그 수많은 깃발들은 그 바람을 막았을 것이다. 갈대까지도 꺾으려고 한 그 광화문 촛불의 광풍(狂風)은 끝내 꺼질 것이다. 그것이 순리다. 따라서 탄핵의 기각도 순리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흐를 수 없다. 다시 말한다. 탄핵의 기각은 순리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