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건설 현장 참여기
주(注) : (다음 글은 제가 2017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과 조갑제 닷컴이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하여 공동으로 벌인 ‘눈물젖은 박정희·····체험수기’ 현상 모집에 참여 하여 우수 상을 받고 샹금 200만원을 받은 글이다. 이 현상 공모에서는 최우수상 1명에게 5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고, 우수상 5명에게는 200만원, 가작 10명에게는 100만원의 상금이 각각 수여됐다. 시상식은 2018년 2월 27일 능동 어린이회관 무지개 극장에서 열렸다.)
http://blog.naver.com/ourpresidentpark/221232287251
--------------------------------------------------------------------
중동건설 현장 참여기(參與記)
2017년 8월 24일
金 日 中
박정희(1917~1979)대통령은 대붕(大鵬)이었다. 그렇다! 그는 분명 큰 붕새였다. 붕새는 한 번에 만 리를 간다. 장자(莊子)(BC369~286)만이 그 새를 보았다. 그만이 그 새가 나는 것을 보았다.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새는 빛나는 진홍색 깃털과 금빛 깃털을 가졌다. 매우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
붕새는 날개 길이가 3천리나 된다. 하루에 9만 리를 난다. 그의 등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그가 성내서 날면 그 날개가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다. 그런데 이 새는 북쪽 바다에 살던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가 변한 것이다. 물고기 곤(鯤)은 아주 커서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었다.
대붕(大鵬)은, 태산(泰山)보다 덩치가 크다. 그래서 쉽게 날 수 없다. 산 들 바람이나 작은 바람에 날 수 없다. 거대한 바람이 불어야 날 수 있다. 때를 만나야 난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웅크리고 앉아 꼼짝 못한다. 이 때 참새들은 이 대붕을 보고 덩치만 크고 날지도 못한다고 흉을 보고 조롱한다.
박정희도 살아생전에 많은 참새들의 조롱을 받았다. 그는 죽어서도 참새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세월이 갈수록 조롱하는, 악구(惡口)하는, 악담(惡談)하는 참새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 통탄(痛歎)할 일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한 미치광이(김재규(1896~1960)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에 9만리 창공을 비상(飛上)하는 한 마리의 대붕(大鵬)(박정희)을 총으로 쏘아 땅에 떨어뜨렸다. 나는 그 시각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한국화약(주) 그룹의 건설회사인 태평양건설(주)의 알 코바 건설현장에 있었다. 이 기업 집단은 후에 한화(韓火)그룹으로 개명(改名)되었다. 그 건설회사도 한화 건설(주)로 바뀌었다.
박대통령이 시해(弑害)된 하루 뒤인 10월 27일 아침 6시에 나는 잠에서 깨었다. 평소대로 영어회화 공부를 위해 미국의 석유회사가 운영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영어방송인 아람코(Aramco) 방송을 틀었다. 그 라디오 방송은 놀랍게도 AP통신을 인용해 박대통령이 한국의 중앙정부장인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보도 했다. 나는 크게 놀랐다. 그 때 그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나는 즉시 공사 현장의 최고 책임자 (현장소장이라 부른다) 인 김 소장 (직급 상무(常務), 서울공대 출신)의 방으로 갔다. 이 뉴스를 전했다. 그는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어방송으로 들었다는 나의 말에 그는 더욱 나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 확인 될 때까지 입을 함봉(緘封)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리고 그는 앞으로 올 정치적인 혼란과 그의 죽음이 중동 건설 현장에 미칠 나쁜 영향을 걱정했다. 10월 29일에 한국에서 파송된 근로들이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에 의해서 대붕(大鵬)의 죽음은 확인되었다.
그 미치광이(김재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반공(反共) 그리고 한미(韓美)동맹이라는 철길 위를 쾌속으로 질주(疾走)하던 ‘조국 근대화’라는 종착역(終着驛)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던 급행열차에 총질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철마(鐵馬)의 기관사(박정희)를 죽였던 것이다. 아아! 그 기관사가 10년만 더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15년만 더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62세의 일생은 짧았다. 너무나도 짧았다.
나는 1978년 4월21일에 출국, 사우디아라비아 알 코바 건설현장에서 1년 8개월을 근무했다. 이 공사가 끝나고 귀국했다. 귀국 6개월 후에 다시 1980년 9월 1일에 사우디아라비아 다란공항 공사장으로 가서 2년 10개월을 근무했다. 모두 4년 반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한 것이다. 시급(時給) 근로자가 아닌 월급 관리자로 근무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서초 국립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내가 중동에서 일한 기간, 즉 1978년~1983년간의 신문(동아일보, 매일경제신문)과 연감(年鑑)(동아일보사가 펴낸 1979년, 80년, 81년, 82년, 83년, 84년의 연감)을 읽었다. 아래의 정보(情報)는 이 열람에서 얻는 것이다. 내가 사용한 이 정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 기록된 대로 ‘사물이나 어떤 상황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나 자료’ 라는 뜻이다. 나는 이 열람(閱覽)에서 나를 포함한 중동건설 현장에서 일한 사람들은 박정희의 덕택(德澤)으로 그 열사(熱砂)의 땅에서 일하고 ‘논과 밭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60년 대 초에 북괴(北傀)의 수출액이 2억 달러이었다. 놀라지 마라. 우리는 1964년에 겨우 1억 달러의 수출을 했다. 1961년도의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83달러. 우리는 그 때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살았다. 1974년에는 제1차 중동의 ‘오일 쇼크’로 국제 수지 적자폭이 17억 1,390달러나 됐다. 나라의 부도를 막을 긴급 대책이 필요했다.
오원철(1925~) 청와대 경제수석은 1974년 1월 30일 박정희에게 국내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을 건의 했다. 그는 즉시 이를 승인하고, 4월 25일 중동에 첫 번째 각료급 사절단을 파견했다. 각 건설업체를 독려하고 법으로 그들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1974년 첫해 해외 건설 수주액(受注額)은 2억 6,000만 달러. 75년에는 8억 5,000달러에 이르렀다. 75년의 해외진출 건설업체의 수는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아건설 등 모두 35개였다.
해외 건설의 수주 집계 액이 75년에 15억 달러, 77년에 75억 달러, 78년에 156억 달러, 80년 말에는 300억 달러에 달했다. 80년 말까지 중동을 비롯하여 세계의 13개 나라에 150,000명의 근로인력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총 65억 달러의 외화(外貨)를 획득했다.
‘동아연감 1984’는 해외 건설 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83년에 동아 건설은 리비아에서 33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83년 한 해에 모두 75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하였다. 83년 말 현재 한국의 건설사들은 세계 34개국에서 1,983개소의 건설현장을 운영하고 있다. 건설 인력은 163,000명, 수주 총액은 650억 달러이다.
한국 건설사들을 1983년 이후 급격한 쇠락(衰落)의 길을 걸었다. 해외건설 입찰에서 아군(我軍)끼리 ‘너 죽고 나 죽자’의 싸움을 벌인 때문이다. 출혈(出血) 입찰로 공사 예정가의 40~50% 선에서 낙찰금액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한 입찰에서 적어도 10개 업체가 경쟁했다. 심지어 어떤 입찰에서는 무려 27개 업체가 경쟁했다.(동아 연간 1984 144쪽). 그 당시 박정희가 살아 있었다면, 그가 이러한 함께 망하는 아귀(餓鬼) 다툼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정주영(1915~2001)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를 15억 2,000만 달러를 입찰금액으로 써낸 경쟁자를 물리치고 상대보다 6억 달러나 저렴한 9억 2,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기를 단축하고 넉넉하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는 한국건설업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다. 이런 쾌거는 다른 재벌사들을 크게 자극했다.
이해, 1976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 경제는 사상 최대의 호황(好況)을 누렸다. 경제 성장률은 1976년 10.6%, 77년 10.0%, 78년 9.3%를 기록했다. 78년에는 1인당 GNP가 1,000달러를 넘어섰다. 박정희가 정한 목표를 2년 앞당겨 달성한 것이다. 그가 정한 목표는 무엇이든 달성되었다.
77년에는 수출액이 1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제 수지는 흑자(黑字)가 됐다. 행운의 여신은 박정희와 함께 하면서 계속 웃고 있었다. 그러나 79년에 그가 죽자 80년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5.7%를 기록했다. 게다가 80년부터 3년간 연이어 흉년이 들었다. 그 때 하늘은 무엇이 그리 못 마땅해서 이 땅에 흉년이 들게 한 것일까?
내가 위에서 언급한 우리 회사 알 코바 공사현장의 공사금액은 2,000만 달러였다. 가로 40미터, 세로 60미터, 높이 20층의 빌딩을 짓는 공사였다. 4층 건물조차 없던 알 코바 도시에 세원 진 이 최신식 빌딩은 당시에 현지인들에게 구경거리가 됐다. 하루에 25만 달러의 생활비를 썼던 세계적인 부호 아드난 카쇼기(1998~1980)의 소유 건물이었다.
이 알 코바 공사를 할 때, 김승연(1952~) 한화그룹 회장이 이사(理事)란 명함을 가지고 수주를 위해 자주 사우디를 방문했다. 그 때 그는 25세의 청년. 겸손했다. 조용했다. 소박했다. 그는 호텔에서 묵지 않고, 우리 건설현장의 허술한 숙소에 묵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입찰 현장을 뛰어 다녔다.
한화건설(주)의 전신인 태평양 건설(주)은 78년 당시 건설도급 순위가 23위(位). 그런데 지금 한화건설은 그 순위가 15위이다. 이 회사는 지금 이락 비스야마 신도시에서 101억 달러의 초대형 공사를 하고 있다. 사우디 사막에 분당 규모의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어마 어마한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다.
한화건설(주)은 지난해에 해외건설 수주에서 1위를 했다. 김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 한국이 중동에서 건설 붐을 일으킨 것같이 한화가 제2의 건설 붐을 일으키겠습니다.” 나는 그가 직접 70년대와 80년대에 중동의 건설공사 입찰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한 경험이 오늘의 결실을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김승연은 81년 한화 그룹의 회장에 취임했을 때, 그 기업 집단의 외형(外形)이 1조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40조에 달한다. 25년 후에 재계(財界)의 거목(巨木)이 됐다. 25세의 청년 김승연은 유난히 그 이마가 넓었다. 이마가 넓으면 관상학에서는 길상(吉相)이다. 사람은 이마가 넓고 볼일이다. 딸 있는 사람은 이마가 넓은 사위를 얻어라.
내가 중동에 간 그해, 1978년에 쌀 한 가마(80kg)의 값은 27, 431원이었다. 1달러는 484원이었다. (통계청 자료). 강남 대치동 31평짜리 은마 아파트의 분양 가격은 1,847만원이었다(그때의 신문 광고). 그 때 우리 건설회사에 근무한 근로자의 시급(時給)은 1.30달러에서 1.80달러였다. 그 시급은 직종마다 달랐다. 그 근로자들은 대략 300달러에서 많게는 550달러를 받았다. 평균 400달러 정도 받았다. 그들은 보통 하루 10시간 일했다. 이보다 더 많이 일한 사람도 있다.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했다. 15시간을 일했다고 해도 과장(誇張)은 아니다. 나처럼 공사현장의 총무와 노무 담당은 깨어 있는 동안은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사우디 다란공항을 통해 사우디를 온 직원들과 근로자들은 내가 다 그들을 공항에서 맞아 우리 숙소에서 재우고, 사우디 각 건설현장에 보냈다. 또 그들이 귀국할 때는 우리 현장에서 재웠고, 또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일들을 즐겁고 기쁘게 했다.
근로자의 월급, 400달러의 경우, 당시 그 돈으로 쌀을 사면 7가마를 살 수 있었다. 한 가마는 80kg이다. 보리 고개를 겪은 사람들은 한 달의 급여가 쌀 7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하면 금방 큰돈이란 것을 안다. 1년 치 급여로 쌀 84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다. 80kg짜리 쌀 84가마를 한 곳에 쌓아보라. 그 당시에는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그 때 나는 과장대리였다. 1년 급여는 보너스 400%를 포함해 230가마의 쌀을 살 수 있는 정도였다. 쌀 80 가마면 논과 밭을 살 수 있었다. 관리직 사원의 경우, 본사 급여의 3배를 받았다. 이사(理事)급 현장 소장들은 1년에 아마 은마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는 우리들이 ‘논과 밭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내가 집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정치가는 나라의 세금을 자기 돈인 것처럼 국민에게 나누어 주고, 마치 의적(義賊)인 것처럼 법의 이름으로 가진 자에게서 돈을 빼앗아 소위 소외(疏外)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박정희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으나 그런 악(惡)한 짓은 안 했다. 그는 권력을 사리사욕(私利私慾)의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내가 경험한 박정희의 절대 권력은 무서웠다. 나는, 1973년에 한국화약(주) 총무부 총무과의 사원이 되기 전에는 대한일보 외신부(外信部) 기자였다. 그 신문이 폐간되던 1973년에 서울에 본사를 둔 중앙일간지는 8개(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한일보, 신아일보)였다.
통신사는 세 개(동양통신, 합동통신, 연합통신)가 있었다. 방송은 5개(KBS, MBC, 동양방송, 동아방송, 기독교방송). 이 19개 언론기관 중 8개는 지금은 그 이름이 사라졌다. 전두환(1931~)이 언론사를 통폐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 대한일보는 박정희가 문을 닫았다. 그것이 폐간 되던 날, 나는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를 붙들고 울었다. “야, 이놈아, 몸만 성하면 산 입에 거미줄 안친다.” 고 어머니는 나를 위로 했다.
대한일보는 그 당시 발행부수로 보면 마이너 신문으로 ‘시시한 신문’이었다. 지금도 부수로 보면, 경향신문, 서울신문, 문화일보, 세계일보, 국민일보 등은 ‘시시한 신문’이다. 한겨레신문도 시시한 신문에 든다. 시시한 신문이긴 해도 신문사 하나를 문 닫게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대한일보는 당시 편집국 기자만 100명이었다. 발행 부수도 10만이 넘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그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 때 언론기간 기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일을 3단 기사로 짧게 보도했다.
박정희의 칼은 대붕(大鵬)의 칼답게 너무 크고, 그 날이 날카로웠다. 시퍼레서 바라보기만 해도 으스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권력을 사사롭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권력을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에 집중했다.
불타(佛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중생에게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대로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은 없다. 호황을 누리던 해외 건설업도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내리막을 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근로자의 임금은 올랐다. 또 서로 간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해외에 진출한 건설사들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필리핀의 근로자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도 그랬다.
그들에 대한 시급(時給)은 우리 근로자의 그것의 70% 수준. 1980년에 각 건설사는 해외현장의 근로자의 10.6%를 외국인으로 대체했다. 81년에 19.4%, 82년에 24.3%, 83년에는 27.1%를 외국근로자를 고용했다 (동아연감 1985, 174쪽).
입찰에서 수주까지 2년이 넘게 걸린 사우디아라비아 알 코바 근처에 소재한 다란공항공사가 1980년 중순에 착공되었다. 공사금액은 5,000만 달러. 당시에는 큰 공사였다. 다란 공항의 기존 활주로(滑走路)를 확장하고, 3차 대전이 일어나도 파괴되지 않는 건물을 짓는 공사였다. 기술이 필요한 공사였다. 더구나 이 공사의 설계를 미(美)육군(陸軍) 공병단(工兵團)(U. S. Army Corps of Engineers)이 했고, 감리도 그들이 하기 때문에 매우 까다로운 공사였다. 이런 공사를 ‘COE 공사’라고 부른다.
시공한 것이 COE 감리 단에 의해 합격되지 않으면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공사는 오직 시공(施工) 사양서(Specifications)대로만 해야 했다. 공사의 지체 보상 조항도 크고 엄격해서 1일의 지체 보상금이 계약금액의 1,000/1 이었다. 하루 지체보상금이 50,000 달러나 됐다. 한 달만 공기가 지연되면, 1,500,000 달러가 날아간다. 공병단이 거부하면 현장소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즉시 현장에서 떠나야 한다.
나는 다시 회사의 명에 의해 그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번의 나의 임무는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조달하는 자재 과장이었다. 필요한 자재는 입찰서에 규정된 미국, 영국 회사에서 구입하고 (이를 수입(輸入)자재라고 칭한다), 입찰서에 생산자의 이름이 규정 안 된 기타 자재 (이를 현지자재라고 칭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 현지나 한국에서 구입해야 했다. 나는 건설자재를 구매한 경험이 없다. 한국화약 그룹의 무역회사인 골든 벨 상사(주)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수출과 수입 등 무역 업무는 알았다.
나와 함께 자재 조달 업무를 하라고 명령 받은 세 사람의 사원도 나와 같이 건설 자재 구매 경험이 없다. 무역 업무도 전혀 몰랐다. 내 위의 관리부장도 건설 자재를 몰랐다. 그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관리부장은 얼마 되지 않아 본사로 복귀 명령을 받았고 그의 후임 건설자재를 아는 부장이 새로 부임했으나 그도 바로 귀국 조치되었다.
나의 직무는 어려울 수밖에 없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부하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조기 귀국해서 나와 부하 두 사람이 50,000,000 달러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조달해야 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부지런 하고 헌신적이어서 현지 조달 자재를 무리 없이 구입하고 수입자재의 조달을 위해 나를 도왔다.
현지 자재 조달은 예상과 달리 어려움 없이 조달했다. 공사 현장에서 40km 떨어진 담만 시장을 두 사람이 빗자루로 쓸듯이 찾아다녀서 현지 자재를 조달했다. 그곳 담만 시장에서 구입 못 하는 자재는 현장에서 천리나 떨어진 수도 리야드까지 가서 구매했다.
문제는 수입자재였다. 그 수입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내가 직접 미국이나 영국의 생산자와 접촉할 수도 없었고, 한국 화약 그룹의 무역 창구인 골든 벨(Golden Bell) 상사(주)의 뉴욕 지사와 런던 지사의 현지 법인을 통해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업무의 한계도 있었다.
수입 자재의 구매에 관한 어려움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한 가지만 말한다. 내가 겪은 수입 자재의 구매에 관한 어려움은 다른 한국 건설회사에서도 경험했을 것이다. 몰라서 겪은 고초(苦楚, 심한 어려움과 괴로움)이다. 나는 위에서 우리가 시공한 공사가 3차 대전의 핵전쟁에서도 무사한 건물을 짓는 일이라고 위에서 말했다. 그 건물에 들어가는 문, 즉 ‘나팔형 문’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을 만드는 회사는 미국에 단 하나뿐이다. 일종의 군수 무기 같은 것이었다.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 그 문은 반드시 그 회사에서 구매해야 했다. 입찰서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보통 문은 집을 다 짓고 나서 달아도 되는 데, 이 문은 공사 중간에 벽 두께가 1m나 되는 콘크리트 벽을 만들기 위한 콘크리트를 타설해야 할 때 필요한 문이었다. 이 문이 없으면 공사를 진척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공사 현장에 투입된 즉시 그 문에 대한 견적을 받았다. 선적 기일이 주문 확정일로부터 1년이었다. 경악할 일이었다. 이 문은 공사를 수주할 그 날에 발주를 해도 공기 내에 선적이 안 되는 문이었다. 독점 생산 하는 그 미국 회사에게 선적 단축을 위해 구구사정(區區私情)을 해도 그들은 꿈적도 안했다. 선적 일을 단축하기는 했어도 만족할 만큼 단축은 못했다. 결국 이 문의 지연 선적은 공사를 기간 내에 완료하는데 지장을 주었다.
미(美)공병단이 감리하는 건설 공사 (이를 ‘COE 공사’ 라고 부른다)를 한 경험이 없는 우리 회사는 공사를 제대로 진척(進陟) 시킬 수 없었다. 시공한 공사가 시험에서 불합격하는 일이 많았다 공사 현장에 1대(代)로 투입된 장 소장은 감리단의 비토로 현장을 떠나 다른 현장으로 갔다.
그 뒤를 이은 2대 유(柳)소장(전무, 서울 공대 토목과)도 감리단의 비토로 부임 6개월 만에 또 귀국해야 했다. 이에 본사에서는 서울 공대와 하버드 대학원에서 학위를 딴 30대 초반의 이(李) 이사를 3대 현장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도 감리단의 만족을 못 얻어 부임 3개월 만에 중도 귀국했다. 내 위에 있던 관리 부장 두 사람도 차례로 본사의 소환 명령을 받고 조기 귀국했다. 하버드 출신의 건축기술자도 미공병단감리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고 우리의 근심을 크게 했다.
공기(工期) 지연은 결국 사우디 정부가 우려를 표했다. 사우디 국왕이 우려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사우디 정부의 우려는 정부를 통해 김종희 한국화약 그룹 회장에게 전달되었다. 한 마디로 난리였다. 그는 비상수단을 써야 했다.
50대 중반의 이사 한 사람이 4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훌륭한 분이었다. 조(趙) 이사였다. 국내에서 미공병단 감리공사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가 온 뒤로 공사는 별 말썽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공과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다. 중앙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도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 같다. 그는 미공병단 감리단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의 인격이 훌륭해서 인지 미국인들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참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 가장 심한 욕은 “이 사람 너무 하네”였다. 그는 공사 현장에 그의 부하들이 지각하면 그저 아침 일찍 공사현장 문 앞에서 웃고 있으면서 그냥 서 있었다. 왜 늦었느냐고 질문도 안했다.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도 우리는 나태하게 지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소장이 부임한 뒤로 우리 관리직 직원과 현장 기사 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작던 크던 어떤 조직의 장(長)의 지도력은 참 중요하다.
공사가 피크에 도달 할 때는 관리 직원과 기술자가 30명이 넘고 근로자도 인도인과 파키스탄 근로자 50명을 포함해 500명이 넘었다. 지연된 공정을 따라 잡기 위해 우리는 글자 그대로 필사적으로 애썼다. 우리는 그 때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쉬었다. 근로자는 하루 10시간을 일했다. 나의 경우,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면, 아침 6시에 기상했다. 점심 식사하고 한 시간 공사 현장의 모든 사람이 1 시간 동안 자기는 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정오 한 낮에는 일 할 수가 없었다. 살인적인 더위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그 불지옥을 모른다.
공사 현장에서 노사 분규는 없었다. 직원들도 회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근로자의 임금은 직종마다 다르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임금은 그가 속한 부서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났다. 일거리가 많은 부서는 잔업을 많이 해서 급여가 후했으나 그렇지 않은 부서는 급여가 적었다. 급여 지급일 다음 날에는 공사 현장에 나오지 않는 근로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받은 급여가 다른 이들보다 적어서 화병(火病)으로 병이 난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런 일은 인간들 속에 내재(內在)한 시기(猜忌), 질투, 경쟁심을 여실히 나타내 준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 그래서 병이 난다.
나는 알 코바 현장에서 노무, 총무업무를 맡았고, 이 현장에서는 자재과장을 하다가 공사 후기에는 차장으로 진급해 관리업무도 했다. 그래서 이 현장에서 근로자 관리업무는 내 업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근로자에게 무조건 친절하려고 애썼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말을 명심(銘心)했다. 인자는 적이 없다는 말이다. 자비무적(慈悲無敵)이란 말을 명심했다. 자비스러운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는 말이다. 불교(佛敎)의 용어다.
나는 식사도 직원 식당에서 하지 않고 그들과 한 식당에서 식사했다. 직원들만 더 좋은 식사를 한다는 오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지 직원들이라고 해서 더 잘 먹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일부 근로자는 직원들의 식사는 더 좋다고 생각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은 소의 뼈를 버린다. 나는 그것을 돈 안주고 얻어다가 밤새 가마솥에 푹푹 삶아서 아침 식사에 그들이 싫다고 할 때까지 제공했다. 6개월 간 먹으면 그 다음에는 안 먹는다. 닭도 마찬가지다. 닭은 사야한다. 튀긴 닭을 질릴 때까지 공급했다. 닭도 6개월을 먹으면 그 뒤로는 안 먹는다. 나는 지금도 닭을 안 먹는다. 그곳에서 원 없이 먹었다.
쌀은 캘리포니아 산으로 제공했다. 그 쌀 참 맛있다. 그런데 가격이 참 싸다. 80kg 한 가마에 우리 돈으로 5,000원(반복 5,000원)이었다. 사우디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여 비싸게 사다 이렇게 헐값으로 제공했다.
나는 노무 관리를 하면서 나를 싫어하는 근로자가 있으면, 그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이야기가 들였다. 나한데 싫은 소리를 들은 근로자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하더란 것이다. “야, 나 그 자식, 스님 말이야, 나 그 한데 혼났다. 내가 나쁜 놈 인 모양이지다. 별명이 스님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현장 근로자들에게 못쓸 짓은 안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한테 욕을 먹은 그가 당연히 나를 험구했어야 하는데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나를 사우디아라비아에 가게하고, 160,000명의 근로자가 ‘논과 밭을 사게’ 한 박정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붕(大鵬)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내가 박정희를 처음 본 것은 1959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 때 대전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날 화창한 날, 그 아침에 고등학교 교정에서 그를 먼발치서 보았다. 그는 군모에 별을 두 개 달고 군복(軍服)차림으로 나의 학교에 나타났다. 그가 박관수(朴寬洙)(1987~1980) 우리 학교 교장을 찾아 인사하러 왔고, 박 교장이 그를 우리들에게 소개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그가 우리 학교 교정에 나타나 아침 조회(朝會)시간에 우리에게 인사할 때, 그가 장자(莊子)만이 볼 수 있었던 그 북해 바다에 살던 큰 물고기 곤(鯤) 인줄을 몰랐다. 그가 후에 대붕(大鵬)이 되어 우리나라를 5,000년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굳건한 초석을 세울 줄은 더욱 몰랐다. 정말 몰랐다. 그가 박정희인지도 몰랐다. 이름도 모르는 장군이었을 뿐이다.
2016년 현재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종합 국력(國力)이 세계 167개 국 중 9위다. 그 순위는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캐나다, 한국이다. 우리의 군사력은 6위. 외환 보유고는 4위. 세계 경제력은 10위. 울산은 세계 1위 공업도시다. 세계 7위 수출국. 세계 8위 무역국이다. GDP는 12위. 우리의 민주주의 성숙도(成熟度)는 2위 그룹에 속한다.
자랑스럽지 않냐?
위 정보(情報)는 지난해에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 기자가 영국의 런던에서 발행되는 시사(時事) 주간지 더 이코노미스트지(紙)(The Economist)를 인용해 그의 기명 칼럼에서 밝힌 것이다. 거짓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아, 내가 묻는다, 누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초석(礎石)을 세웠냐? 그는 박정희가 아니냐? 그렇다! 그는 박정희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붕새라고, 대붕(大鵬)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존경하던 박관수 교장은 아침 조회를 할 때 가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내 평생소원은 내 제자 중에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너희 중에서 내 소원을 이룰 아이가 없을까? 너희들처럼 농촌에서 토끼들이 다니던 길에서 지게를 져 본 아이들이 대통령이 돼야 나라가 잘된다.”고.
내가 고교를 졸업하던 1961년에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이어서 박정희가 민선(民選) 대통령이 됐다.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나의 고등학교 교장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 교장이 대구사범학교 에서 박정희를 가르쳤던 것이다. 나의 고교 그 은사(恩師), 박관수는 아시아 반공 연맹 이사장으로, 공산권 문제 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박정희를 열심히 도왔다.
인명(人名)사전은 박관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용 일부를 내가 삭제하고 정리했다. 추가하기도 했다. 박관수(朴寬洙, 1897~1980).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금계(琴溪). 경상남도 울산 출신. 관립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뒤 191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 1922년 도쿄(東京)제국대학 철학과를 수료. 1924년 대구 고등보통학교 학감, 1926년 경상북도사범학교 교유 등을 거쳐 1938년 1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에 임명되었다.
1940년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 1944년 4월 춘천공립중학교 교장. 해방 후 1952년 경북대학교 교수, 1958년 대전고등학교 교장,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 등 교육자로 활동했다. 1966년 한국아세아 반공연맹 이사장, 1970년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 1971년 헌정회 이사, 1972년 대한노인회 회장 등을 맡았다. 여러 우익 단체의 장으로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전념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박관수 교장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에 대한 나의 지식의 전부는 경북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총장 선거에서 낙선, 교수직을 고만두고 자원해서 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때 그의 연세는 60대 초반이었는데도 너무 늙어 보였다. 키도 작고, 인물도 결코 잘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정기(精氣)가 넘쳤고 범접(犯接) 못할 어떤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비범(非凡)한 인물이었다. 새로 비유한다면 칠색(七色鳥)이었다.
1959년 어느 5월 화창한 날이었다. 예정에 없던 아침 조례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모두 교정에 모였다. 박관수 교장이 교단에 올라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제자 하나가 장군이다. 그가 나에게 오늘 인사하러 찾아 왔다. 나 참 기쁘다. 너희들에게 그를 소개 한다. 그를 박수로 맞아라.” 그는 스승의 날이라서 대전 주둔(駐屯) 3관구 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인사차 왔던 것이다.
군모와 견장에 빛나는 별을 두 개 단 그 장군이 연단에 올라와서 인사를 하고 길지 않은 연설을 했다. 60년 전 일이라서 그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똑똑히 기역하고 있는 것은 박관수 교장이 아주 훌륭한 스승이니 그의 말을 잘 따르라고 한 말이다. 또 교장선생의 꿈은 그의 제자 중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니, 우리 학교에서 앞으로 그의 소원을 이루는 학생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한 말이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군모에 군복의 견장(肩章)에 별을 단 육군 장군을 가까이서 처음 보았다. 그 때, 1950년대에는 장군이 참 귀했다. 별을 두 개 단 장군은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별 두 개를 단 박정희를 보고 실망했다. (다시 말한다. 그때는 그가 박정희인지 몰랐다). 그는 연설을 잘하지 못했다. 그의 외모가 내가 내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장군 이미지와 모든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의 머릿속에는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이순신 장군, 계백장군, 김유신 장군, 강감찬 장군 등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 별 두 개의 그 장군은 그들과 너무 달랐다.
그 장군은 키도 크지 않았다. 마른 체구였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평했다. “장군은 무슨 놈의 장군야! 똥 장군이네!” 나는 참 사람을 몰라 본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참새인 내가 그 때 곤(鯤)(육군 소장)이었던 그가 앞으로 대붕(大鵬)(대한민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것이다. 5·16군사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 땅의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나 그가 북해에 살던 곤(鯤)이고 후에 대붕(大鵬)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알았다 해도 그 수는 결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박관수 교장은 일주일에 한 번 아침 조회를 했다. 그는 조회 때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다방면의 여러 가지 주제들을 놓고 연설하고 훈시했다. 꾸중도 했다. 칭찬과 격려도 했다. 그의 훈시와 연설은 언제나 새롭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정직해야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지식은 힘이라고 주장하면서, 영어로 놀리지 이즈 파우워(Knowledge is power)라고 외쳤다. 빌어먹으려면 공부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나라에 헌신하는 큰 지식인을 만들고 싶어 했다. 지도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제자들이 나라의 해충(害蟲)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한국 도덕재무장 운동(Moral Re-armament)의 부총재를 하면서 절대 정직, 절대 순결, 절대 무사(無私) 그리고 절대 사랑을 강조했다. 그는 정준(鄭濬)(1915~2004) 도덕재무장운동의 총재를 학교에 초대 하여 우리가 그의 연설을 듣게도 했다.
그는 우리의 기(氣)를 살려 주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긍지를 갖게 하려고 했다. 우리들이 경기고등학교 학생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 마디로 그는 우리의 간이 붓게 만들었다. 서울 갔다 오면 김원기 경기고등학교 교장을 만난 일도 전했다. 그는 우리 한 해 선배들(대전고 39회 졸업)을 서울대학에 180명을 넣었다. 그는 우리 학교가 경희대학교(당시의 교명은 신흥대학)에서 열렸던 전국 고등학교 학술 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게도 했다. 그의 제자 육성(育成)에 대한 극성(極盛)이 우리 학교에서 기염(氣焰)을 토한 것이다.
박 교장은 우리를 1학년 때는 우열반으로 나누어 공부시켰다. 시험을 보아서 1등에서 60등까지는 1반, 61등에서 120등 까지는 2반, 121등에서 180등까지는 3반으로 편성해서 우반(優班)을 만들고, 나머지는 섞어서 4, 5, 6, 7 그리고 8반의 열반(劣班)을 만들었다. 우리 동기 동창은 모두 500명이었다. 그는 우리가 감독선생이 없이 시험을 치르게 했다.
2학년 때는 우열반이 없이 공부했다. 박 교장은 3학년 때 우리를 문과 반과 이과 반으로 나누어 매월 모의고사를 보게 했다. 그리고 그 성적을 문과(文科)는 문과대로 이과(理科)는 이과대로 100등 안에 드는 학생의 이름을 성적순으로 교정에 방(傍)을 써 붙였다. 경쟁심을 유도하고 부추긴 것이다.
그 당시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문교부의 지시로 머리를 박박 깎고 다녔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머리를 기르게 했다. 그 때 고교 학생으로 머리를 기르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큰 특권(特權)이었다. 자랑이기도 했다. 전국에서 서울 보성고교만 머리를 기르고 다니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내가 고교 2학년 때 우리 학교를 방문했던 그 장군이 박정희 장군이었던 것을 뒤 늦게 알게 되었다. 내 고교 동창들 중 대부분은 박 소장이 우리 학교를 방문한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고교 때 박 교장이 한 장군을 소개해서 연설한 것은 기억한다. 교장이 그의 제자 중에서 대통령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한 것은 거의 모든 동기들이 기억한다. 그러면서 박대통령이 우리 교장 선생의 소원을 이룬 것을 매우 신비롭게 생각한다.
박 소장(少將)이 우리 고등학교를 방문한 뒤 정확히 2년 후에 5. 16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우리 동기동창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 지금 생각하니 박 소장이 우리 학교를 왔을 때 박관수 교장께서 그에게 나라를 구하라고 말했을 것 같기도 해!” 라고. 지금 두 사람이 모두 타계(他界)했으니, 그들 간의 은밀(隱密)한 대화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에서 대통령을 만들고 싶다는 박관수 교장을 박정장군이 매우 존경했다는 사실과 그가 그의 스승의 소원을 이루었다는 사실에는 함수(函數) 관계가 있을 것이다.
여담(餘談)을 하나 하고 가자. 나의 고교 동기 동창 중에 정란영(1943~)이가 있다. 2013년의 동기생 수첩에 그의 직함이 제약회사 대웅의 대표 이사로 되어있다. 지금(2017년)은 그의 직함이 오너 회장이 아닌 월급 받는 회장이다. 이는 그의 능력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달변가(達辯家)이기도 하다. 매우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가지고 있다. 개그만 이주일(1940~2002)을 뺨치는 개그 능력의 소유자다.
그래서 그런지 ROTC 출신 소위 정란영은 육해공군 해병대 간의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 육군을 대표하는 응원단장을 지냈다. 그는 GOP에서 근무 할 때, 휴전선을 시찰하는 모든 VIP를 상대로 북괴와 전선(戰線)에 관해 브리핑을 하는 장교로 일하기도 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박관수가 아시아반공연맹 이사장 자격으로 정 소위가 근무하는 휴전선에 왔다. 그는 박 이사장을 따라온 정부의 실세(實勢)들과 그들은 수행한 많은 장성(將星)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그리고 브리핑의 말미(末尾)에 그가 박이사장의 고등학교 제자란 것을 밝혔다.
뛰어난 브리핑에 매료된 일행이 정 소위(少尉)가 박이사장의 제자란 것을 밝혀지자 모두 환호했다. 뜨겁게 박수를 쳤다. 박 이사장(理事長)도 그의 브리핑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가 그의 제자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기뻐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브리핑을 칭찬했다. 가까이 불러 악수도 했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 진 것이다. 스승이 세월이 흐른 뒤에 훌륭하게 자란 제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 소위는 이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그의 사단에서 유명한 장교가 됐다. 그가 전역(轉役)하려고 힐 때, 앞으로 그가 적어도 3성 장군감이라고 농담을 하면서 전역을 말렸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의 참모와 당신의 실세들은 박관수를 매우 어려워했다. GOP를 찾은 그 때의 그 일행들이 박이사장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는 박관수의 권위(權威)와 위세(威勢)를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은 박정희가 어떻게 나라의 부도를 막았고, 어떻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는지, 그 일부를 알게 되었다. 전부가 아니고 극히 일부다. 내가 박정희의 덕택으로 사우디 현장에서 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든 중동에서 일한 근로자들도 그의 혜택을 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근로자 모두는 참으로 열심히 일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박정희가 붕새였다고, 대붕(大鵬)이었다고 거듭 주장한다. 세상 사람들아, 박정희를 부정하는 자들을 경계(警戒)하라.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부정하는 자들을 경계 하라. 반공(反共)을 부정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한미 동맹(同盟)을 깨려는 자들을 경계하라. 그들은 우리 모두를 빌어먹게 할 자 들이다. 빌어먹고 싶으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따르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