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고 (독후감)

김일중 2019. 11. 26. 22:14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고 (독후감)

 2019년 11월 25일 김 일 중

 

저자 김용옥(1948~ )은 그의 책 202쪽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한 야훼하나님, 사랑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을 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 (“협박하는 하나님” (God of intimidation)은 내말이 아닌 신학 용어임) 그러한 하나님은, 마피아의 두목보다도 더 무서운 깡패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깡패새끼 하나님”은 디아스포라(diaspora,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지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 만을 부랑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인들에게 느껴지는, 즉, 그들의 몸에 배어있는 유목기질(nomadic temperament)에 너무도 적합한 신앙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고요한 새벽의 나라 조선에 조용히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다.”

 

위 글에서 “협박하는 하나님”과 “깡패새끼 하나님”에는 따옴표(“”)를 붙인 것을 보면 이 따옴표 속의 단어들은 저자가 사용해온 것들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마피아의 두목보다도 더 무서운 깡패새끼에 지나지 않는다고 묘사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모욕적인 표현이다. 아래 글은 그의 책 201쪽에 있다. “하느님과 따님은 스스로 그러한 데에 내맡기며, 함이 없고 또 조작함이 없다. 그렇게 때문에 온갖 사물은 서로 스스로 다스리고 질서 지운다. 그러므로 사상가 라오쯔 (老子)가 하느님과 따님은 인자하시지 않으시다고 말한 것이다. 인자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조작하고(造) 세우고(立) 베풀고(施) 또 감화시키시고(化) 하는 것을 말함이니 이는 반드시 은혜가 있게 되고 함이 있게 된다. 세우고 베풀고 감화시키시면 사물은 그 참모습을 잃어버린다.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반드시 치우치는 쪽이 생겨나서 모든 사물을 꼭 고루 보전할 수 없게 된다. 사물이 골고루 보전할 수 없으면 곧 모든 것을 온전하게 포괄할 수 없게 되니 그러한 하느님과 따님은 진정한 하느님과 따님이 아니니라.” 이 글은 라오쯔(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네 글자를 왕필(王弼, 226~249)이 주석(註釋)한 것인데, 그 한문 주석(註釋)을 김용옥이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왕필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신하이다. 천재로 23세에 요절했다.

 

저자는, 그가 천(天)을 하느님이라 번역하고, 지(地)를 따님 (땅님, 자음과 자음이 겹쳐서 앞의 자음이 떨어져 나갔다) 이라고 번역했다고 밝혔으나, 도덕경에서는 하늘과 땅을 인격을 부여해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즉, 의인화 (擬人化)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나는 위와 같은 天地不仁 (하느님과 따님은 인자하지 않으시다) 이란 네 글자의 해석을 읽고 동양 사상의 큰 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노장(老莊)사상을 무위(無爲)사상이라고 하는데, 이 무위 사상을 이처럼 쉽게 설명해 주는 이가 더 있을 가? 동양의 하느님은 ‘하는 일 없이 하는 하느님’인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고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한다. 그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늘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포수가 아무리 총을 쏴대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새를 잡을 수 없다. 동양의 천(天)과는 아주 다른 인격신이다. 이 글에서 God을 “하나님”이라고도 하고 “하느님”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을 주목하라.

 

내가 읽은 책은 저자가 38세 때 쓴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3년 됐을 때 쓴 것이다. 원고지 2,000 매의 분량. 잔글씨로 297쪽의 책. 책의 앞표지에는 이런 문장들이 보인다. “동양사상 입문 특강, 여자란 무엇인가” 뒤표지에는 저자의 사진이 있다. 그를 소개하는 글도 있다.  그 사진 속의 김용옥은 그 머리가 새까맣다. 그가 입은 두루마기도 새까맣다. 그러나 두루마기의 동정은 새하얗다. 사진 속의 그의 눈은 형형(熒熒)하다. 강한 힘이 느껴진다. 젊은 그는 잘생겼다. 그를 소개하는 글 속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동방의 등불 아침의 나라도 이제 인류를 향해 지성의 포문을 열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말처럼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서양의 철학자, 학자를 비판하고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거침이 없다.

 

김용옥은 자기 스스로를 “동양철학자, 도가(道家) 계열의 사상가”라고 말한다.(그의 책 40쪽). 그러면서 그는 “라오쯔(老子)와 주앙쯔(莊子)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집요하다”고 밝혔다. (40쪽).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비웃겠지만, 나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내가 천자라고 느꼈다”고 (40쪽) 쓰면서 자신을 천재라고 자칭하기도 한다.

 

그의 글을 더 인용해 본다. 61쪽의 글이다. “나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모차르트와 나와의 행동에 너무도 많은 유사성을 느꼈다. 내가 확실히 말한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악보의 초고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 모차르트의 모든 악보가 단 한 번에 써 내려간 사실에 대한 살리에리의 경탄이다. 나 역시 나의 모든 작품을 일회의 언어로 직접 표현한다. 나는 나의 삶의 방대한 작품을 매우 짧은 시간에 일회적인 속필로 내갈긴다. 나의 모든 원고는 정사한 것처럼 깨끗하다. 나는 나의 대만대학 석사 논문을 20일에, 동경대학 석사 논문을 20일에, 하버드 대학 박사논문을 40일에 썼다. 그 언어는 그 나라 말로 번역 과정이 없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직접 그대로 옮긴 것이고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외국어이다.”

 

“하버드 대학 논문만 하더라고 파이카 타이핑으로 계산하면 500페이지가 족신히 넘는다. 400매의 절차탁마(切磋琢磨)대기만성(大器晩成)처럼 상세한 주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회분이 모두 400 매를 넘는데도 모두 열흘 이내로 쓴 것이다. 일단 쓴 문장에는 개칠을 가하는 법이 없다. 옆에서 내가 쓰는 원고지를 베끼기만 해도 도저히 나를 따라올 수가 없다.” 그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는 천재다.

 

김용옥은 그 자신을 이렇게도 그린다. “나는 분명 중국, 한국, 일본의 문명권의 사상에 관한한 토인비나 베버 같은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고문헌을 읽은 사람이다. 비교 문화적 시각이라고 하면 우리는 슈펭글러, 토인비, 베버, 니이답, 왕링과 같은 이론을 떠 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왕링을 제외하고는 나만큼 동양 문헌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110쪽). 토인비를 아이라고 표현하는 김용옥이 나는 좋다.

김용옥은 그가 자신을 광인(狂人)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85쪽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학생이 언젠가 나에게 “선생님은 고려 대학교 무당 이십니다”라고 뇌까렸던 것을 기억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때때로 광인으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지 미치지 않고 성공하는 일은 없으니까.” 그가 말하는 무당이란 실성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 (BC582-BC497)도 무당이었다. 김용옥은 그의 다른 책에서 예수를 큰무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책의 192쪽에서 “예수도 광야에서 무당이 되기 위해 40일 동안 “산기도” 아닌 “사막기도”를 했다고 쓰고 있다.

 

여자란 누구인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1985년 11월 30일 토요일 오후에 고려대학교에서 내가 행한 단 일회의 강의 내용의 옮김에 불과하다. 나의 동양사상입문이라는 매우 평범한 전교생 상대의 교양강의의 한 학기를 끝내는 마지막 시간 강의 내용에 불과하다.” (35쪽). 그때의 참석인원은 2,000명이었다. 고대생 뿐 아니라 타교생도 있었고 일반인도 있었다. 그런데 그 강의가 저자가 생각하기에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이 책에는 강의 내용과 책이 나오기까지의 여러 자세한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게 기술되어 있다.

 

김용옥은 그의 책에서 그날의 강의를 무병(巫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정식 무당이 되기 위해 하는 내림굿으로 비유했는데, 그는 굿 (강의)에서 실패했다.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한 것이다. 굿에서 성공한 무당은 작두를 타야하는데 그는 작두를 타지 못한 무당이 되어버린 격이되었다. 그는 맨발로 시퍼런 작두 칼 날 위에서 신바람 나게 춤을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실제 그는 강의 5일 전부터 “10년 동안 감기약 한 알 안 먹고 살았는데 심하게 앓았다.” (85쪽).

 

책의 내용 중 거의 3분의 1이 서론이다. 이 서론 중에는 김용옥의 부모가 맞은 회혼례(回婚禮)에 관한 기술이 있다. 결혼하고 60년을 함께 산 부부가 치르는 예식이 회혼례이다. 그 예식의 진행을 저자가 대본, 기획, 연출, 연기를 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그것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어딘가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녔다. 일생동안 성경을 1,000번 읽었다. 그 성경은 신구약으로 구성된, 한글 글자로 1,600,000자의 두꺼운 책이다. 나는 65세 부터 3년 동안 한글타자 1급 자격증을 딸려고 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을 타자해봐서 성경의 모든 글자 수를 안다. 

 

여자란 무엇이가의 본론이 101쪽부터 시작되어 275에서 끝난다. 그런데 끝까지 읽어 보면 이 책의 주제가 아직도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한 또 다른 서론이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가름(章)은 지금부터 앞으로 말하고자하는 여성의 제 문제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마련하기 위한 가름(章)이며, 내가 1985년 11월 30일에 행한 동양철학 특강(제 4회 종강기념 특강)의 강의 안으로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열한장의 페이퍼 중의 제일 페이지에 해당할 뿐이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가름의 주제는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따님의 회복이다. 그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회복이며 맨(man)에 대한 르언(人)의 회복이다. 하느님에 대한 따님의 회복이라는 이 하나의 주제가 이렇게도 많은 학문의 제 분야와 연관을 가지로 있다는 것은 독자들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274쪽).

 

나는 이제 저자가 쓴 “여성의 제 문제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 틀의 내용을 요약해야 한다. 저자는 이 틀을 만들기 위해 먼저 남자와 여자의 어원(語原, 語源) 분석을 한 후, 다시 비교문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어원은 어떤 말이 오늘 날의 형태나 뜻으로 되기 전의 본디 형태나 뜻을 말한다. 그는 영어의 man과 woman의 어원을 밝히고, 한자의 인(人)의 어원을 밝힌다. 이를 위해 그는 고대 철학자들과 성경을 등장시키고, 주역(周易), 중용(中庸), 사기(史記) 등 중국의 여러 고전을 이용한다.

 

여자는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저자는 서양의 남성관과 여성관을 동양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이론의 틀을 마련하는데, 서양에서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 속에는 남자만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 사람 속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는 애초에 여권(女權)이 아예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동양에서는 여권이 남권에 비해 약했으나 분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창세기 신화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인 아담을 흙으로 만든 뒤, 그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여자인 하와를 만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의 정원 초과로 생겨난 하나의 심심풀이 씨받이에 불과 하다.” 그러나 중국의 고전은 하늘의 양기(陽氣)와 땅의 음기(陰氣)가 합해 사람, 즉, 인(人)이 생겼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을 뜻하는 인(人)의 어원(語源)을 이렇게 분석한다. “인(人)은 하늘과 땅의 성(性)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이 글자는 사람의 팔과 다리의 형상을 뜬 것이다. 중국사상은 하늘과 땅 그 자체에 내재하는 덕성의 생명력이 결정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 자체가 여성성(feminity)과 남성성(masculinity)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인간은 바로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체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113쪽).

 

저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BC384-322)는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이고 그 결여의 덕택에 여성일 뿐이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성을 자연 상태의 결함으로 밖에 간주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성 토마스아퀴나스(1225?-1274)는 여자를 “불안전한 남자 (an imperfect man)”로 정의 하고, “존재해야 할 필연성이 없는 존재고, 무엇이든지 주체로 결정할 수 있는 피조물이 아니고, 항구성이 없는 존재”라고 정의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쓴다. “서양에 있어서의 여성은 전 역사를 통하여 인성(humanity)의 제1차적인 성으로서의 자격을 갖는 성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2차적인 “제2의 성”이며 남성과 동등한 다른 이성(異性)이 아니다.”

 

글에서 성(性)을 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성기와 여성기을 언급하게 되고 성교란 단어도 사용되는데 저자는 그 단어들을 순수 우리말로 대체해서 사용한다. 즉, 자지, 보지 그리고 씹이란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한다. 성을 말하다 보니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의 학설이 책 속에 등장하는데, 그의 학설이 여자란 무엇인가의 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유용하게 사용된다. 저자는, 그러나 프로이트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심하게 비판한다. 그 비판도 읽을 만하다.

 

저자가 여자를 다루다 보니 남자를 다루지 않을 수 없고 남자를 다루다 보니 인간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다루다 보니 철학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을 다루다 보니 자연 종교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하도 아는 것이 많아서 주제를 논하다가도 큰 길을 벗어나 자주 곁길로 빠진다. 그래서 그의 글은 길어지나 그 곁가지의 글이 무척 재미있고 새로운 지식이 많이 들어있다.

 

저자는 여자란 무엇인가를 다룰 때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특히 동서양의 종교의 차이를 논한다. 이 책을 읽기만 해도 독자는 종교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을 얻을 수가 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다소 책의 이해가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서양종교는 유목민죽의 종교요, 동양종교는 농경민족의 종교라고 소개하면서 이점을 그의 논지(論旨)를 뒷받침하는 글을 쓰는데 사용한다. 저자에 따르면, 쉽게 말해서 기독교는 하나님 (하늘님)을 숭배하는 종교요, 남성성 (자지)을 숭배하는 종교고, 유교도 하느님(하늘, 즉 자지)을 숭배하는 종교이고, 도교는 따님 (땅, 보지)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하늘 숭배와 땅의 숭배가 균형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중국인들에게 남자는 한 마디로 하늘이고 도끼 (힘)이고, 여자는 땅인데 아이를 낳는다는 점에서 생산(生産)이란 것이다. 곡식은 땅에서 나기 때문에 초기 인류는 땅을 매우 중요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힘의 상징인 하늘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대민족에게는 (히브리 문명)생계 수단이 농사가 아니고 양과 동물을 키우는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땅보다는 하늘이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서 기독교에 대해 심한 욕을 해대는데, 그는 책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비판하는 것은 “서구 문명의 기독교라는 문화제국주의이다”고 말한다. 그는 책 125쪽에서 “예수는 베들레헴 마구 깐의 거지새끼 (욕이 아니고 당시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 되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성경의 구약을 우리나라의 이조실록과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마리아가 ”씹“의 행위 없이 성령(Holy spirit)이나 하늘에 감(感)하여 얘기를 배개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비생물학적 거짓말이면서도 이 거짓말이 비단 신약성서에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고대 탄생설화에 공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성교 없이도 탄생한 위인들이 중국고전에 나타나 있는 것을 열거했다. 주(周)나라를 세운 후직(后稷)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후직의 어미가 들에 나가 거대한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음욕이 느껴져 그 발자국을 밟고 잉태했다. 은(殷)나라를 섭정한 명재상 이인은 시들어 버린 뽕나무에서 탄생했다.

 

저자는 2세기의 우리 조상의 종교에 관해서도 언급했는데, 우리 조상들은 하느님을 섬기었다고 밝혔다. 솟터, 서낭, 사직(社稷)과 무당들의 굿을 분석해서 기독교의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종교 행위가 우리의 조상들의 종교행위에도 다 나타나고 있는 것을 일일이 제시했다. 그의 이런 제시는 매우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간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스라엘 역사만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우리민족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로 보지 못하는 바보 새끼들은 더 이상 역사를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71쪽). 그는 견우와 직녀에 관한 설화와 춘향전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도 했다. 그의 자지 숭배와 보지 숭배 이론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면 비가 내릴 때 그 비의 의미를 “좃물”로 해석한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느낀 점을 간단히 하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동서양을 통해 종교란 그 양태가 숭배 대상이 다르긴 해도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의 종교를 심하게 비판하고 헐뜯는 일은 악이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김용옥은 기독교의 동정녀 탄생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 이유를 세게 곳곳에서 그런 신화가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든다. 그런 설화가 많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설화들이 예수의 탄생이 거짓이라고는 할 순 없다. 20세기에 믿지 않는 사람을 가장 많이 교회로 이끈 사람인 C. S. 루이스 (C. S. Lewis, 1898-1963)는 예수 탄생 이전에 나타났던 그 설화(說話)들은 예수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미리 예고해준 가짜 설화였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탄생은 역사적인 사실이란 것이다. 영화의 예고편과 실제의 영화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보다 많이 공부하고 그래서 많이 알고 있어서, 그래서 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궁진하면 교만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옥의 교만을 인정해주고 그의 책을 읽으면 그의 박학다식한 넓고도 깊은 지식, 유려한 필치, 천재성, 그리고 한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의 책이 세계적인 석학 주준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을 한 번 읽어 보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