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전기를 읽고 (독후감)
스탈린의 전기를 읽고 (독후감)
2021년 8월 13일
김 일 중
“이오시프 스탈린 (Iosif Stalin, 1879-1953)은 역사상 가장 악명(惡名) 높은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대량 학살(虐殺)하도록 명령했다” (책의 15쪽에서 인용). 악명은 악하기로 소문난 이름을 뜻하고, 학살은 참혹하게 죽임을 말한다. 아래 문장도 이 전기에 기록돼 있다. “스탈린은 권력에 굶주린 살인자였다.” (20쪽). “스탈린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하고 끔찍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30쪽). “스탈린은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도 밤에 잘 잤다.” (529쪽).
스탈린이 희대미문(稀代未聞)의 살인마요, 살인귀였으나,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죽었을 때, 소련인민들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를 존경했고 애정을 품고 있었다.” (823쪽). “3월 6일 라디오와 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알렸다. 사람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880쪽). 모스코바 붉은 광장의 관에 안치된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깔려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발했다.” (885쪽).
“3월 8일에는 경찰이 통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려들자 공포가 엄습해 많은 사람이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수많은 사람이 짓밟혀 큰 부상을 입었고 질식해 죽은 사람만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는 신문에서 다루지 못했다. 지도자는 관 속에서도 마구잡이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883쪽). “관 속에서 마구잡이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를 음미하라.
스탈린의 이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879년 : 소련의 구루지아 공화국에서 태어나다.
1905년 : 레닌을 처음으로 만나다. 레닌(1870-1924)은 지구상에 공산주의 국가를 최초로 세운 혁명가이다.
1913년-1917년 : 고향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유형(流刑) 생활을 하다. 유형은 죄인을 외탄 곳으로 보내어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스탈린은 나라에서 주는 생활비로 유형지에서 살았다.
1917년 : 레닌이 주도하여 러시아 로마노프 왕정을 타도한 10월 혁명에 참여.
1923년-1924년 : 레닌 통치 시대의 2인자가 되다.
1924년-1953년 :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다.
스탈린은 4반세기 동안 소련을 통치하면서 소련을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소련을 공업화하고,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했고, 철저한 경찰 테러에 의해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41~45년에 벌어진 히틀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데 일조했고, 소련의 지배권을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대했다. 그는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최고 설계자였고, 가공할 정도로 무자비한 조직가였다. 그는 그의 시대에 남아 있던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생활수준을 궁핍하게 만들었으나 소련을 군사 강국으로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보다는 4년 늦었으나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스탈린은 1930년 초에 그의 적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464쪽). 그는 1934년에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공산당원들에 대한 새로운 정치 폭력전을 벌였다. 그는 고위 공산당원들에 대한 여론 재판을 폭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1936년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37년과 1938년에 또다시 대규모의 재판이 벌어졌다. 1937년에는 당시 군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그밖의 고위 장성들이 반역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1953년 2월 28일 스탈린은 말렌코프, 베리야, 후루시쵸프, 불가닌을 초대해 별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았다. (중략) 3월1일 새벽 4시에 파티가 끝났다.” (872쪽) 평소와 달리 3월 1일 오후 6시 반에서야 별장 안의 한 방에서 불이 켜졌다. 스탈린이 기상했다는 표시이다. 경호원이 스탈린의 명령을 기다려도 그로부터 4시간 반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스탈린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도 그의 방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하명을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 경호원이 그의 방에 그날 “오후 4시 반에” 들어갔다. (873쪽). 그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3월 5일 아침에 그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876쪽). “1953년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며칠 동안은 언제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완전히 안개에 쌓여있다.” (876쪽). 그의 사인에 대해 밝혀진 것이 없다. 스탈린의 광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가 쓰러졌기 떼문에 그를 살리려는 노력이 안 보였다. 비밀 경찰의 두목 베리야가 독약으로 죽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죽자 모든 사람들이 놀랐으나, 딱 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그가 바로 베리야였다. "그는 마치 우리에서 풀려난 표범 같았다" (870쪽).
“스탈린의 아버지 베사리온은 구두 장이었고, 성질이 나쁘고 폭력을 휘둘렀고, 술주정뱅이.였다.” (39쪽). 어머니 케터번은 신앙심이 깊었고, 스탈린이 성지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녀는 남편의 수입이 없어 “청소부와 침모로 일했는데 몸을 팔기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41쪽). “스탈린이 당시의 유명한 한 민속학자이자 탐험가인, 한 귀족과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소문도 있다." (43쪽).
“스탈린은 학교 다닐 때, 신앙심이 깊고, 영리했다. 그는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인정을 받았다.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산수를 뺀 전 과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는 1899년, 19세 때, 마지막 시험을 보지 않고 자기 발로 신학교를 떠났다.” (78쪽).
스탈린은 27세 때, 재봉사였던, 케테반 스비니제와 결혼했다. 이 아내는 아들 둘을 낳고 곧 죽었다. 아들들은 처가에 맡겨 길렀다. 장남 야코프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적군의 14기갑 사단의 대위였다. 그는 2차 대전 중 독일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됐다. 히틀러가 이 아들을 포로가 된, 한 유명한 독일 장군과 교환하자고 했는데, 스탈린이 거절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총살되었다. 차남 바실리는 공군장교이었는데, 스탈린의 집권 시에 고속 승진으로 아들대접을 받았으나 "파티광에, 술고래에 방탕한 것으로 유명했다." (890쪽). 딸들도 아버지를 괴롭혔다. 한 딸은 두 번이나 이혼했고, 딸 스베틀라나는 아버지의 사후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았다.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 온 스탈린은 그의 나이의 반도 한 되는 젊은 여자 나댜와 재혼했으나 그녀가 질투가 심하고 정신분열증이 있어 부부 간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있었다. 스탈린이 매우 힘들어 했다. 그녀는 “이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도망갔고 두 번이나 낙태를 했다,” (455쪽). 그녀는 딸 둘을 낳았다. 그녀는 결국 권총으로 자기 심장을 쏘아 자살했다. 그의 사인은 맹장염으로 발표됐다. 스탈린은 첫 부인이 죽었을 때는 고향의 한 과부와 아이를 얻었으나 자기 아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유형 때는 14세의 소녀를 유혹해 아이를 얻었으나 그가 집권했을 때 그 아들을 모르는 척했다. 스탈린의 가정생활을 매우 불행했다. 아들과 딸들이 청소년 때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반항했다. 스탈린은 두 처가 식구들에게 적대적이었고 죽이고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