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사랑’을 읽고 (독후감)
2019년 12월 6일
김 일 중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은 루이스 (C. S. Lewis, 1898-1963)가 지은 책이다. 이종태가 번역했고 홍성사가 펴냈다. 모두 237 쪽. 저자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고 작가였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탁월한 변증가였다. 하나님의 존재를 글로 증명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무신론자를 가장 많이 유신론자로 만든 기독교 사상가이다.
루이스가 2차 대전 때 영국 BBC 방송에서 기독교에 대해 강연할 때는 런던 거리가 조용했다고 한다. 런던 시민들과 택시기사들이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집에 머물고 운전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칠 수상의 연설은 안 들어도 그의 강의는 빼놓기 않고 들었다.
이 책을 짧게 요약하면 사랑에 관한 기독교적인 탐구서이다. 루이스는 이 책에서 1)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 2) 친구 간의 사랑, 3) 남녀 간의 사랑, 4) 하나님의 사랑을 탐구(探究 : 진리나 법칙 따위를 더듬어 깊이 연구함)한다. 앞의 이 1)의 사랑을 애정(Affection love), 2)의 사랑을 우정(Friendship love), 3)의 사랑을 에로스 (Eros love), 4)의 사람을 자비(Charity love)라고 부르고, 애정, 우정, 에로스의 덕성(德性)과 위험성을 지적한다. 위험성은 사랑이 인간에게 미치는 역기능을 말한다. 그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 (이 책의 21쪽).
저자는 애정, 우정, 에로스는 완전한 사랑이 아니고, 오직 자비만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므로, 애정, 우정, 에로스가 더 승화되어 (昇華, 사물이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일) 자비로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이렇게 쓴다. “인간은 오직, 죽으시고 천국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안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오직 사랑 자체이신 분 그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랑만이 그분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 (이 책 230쪽).
루이스는 애정, 우정, 에로스를 자연적인 사랑 (Natural love)으로, 자비는 초자연적인 사랑 (Supernatural)이라 구별하는데, 이 네 가지를 실례와 사변(思辨)을 통해 아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성(性), 소유, 질투, 교만, 긍지, 잘못된 감상주의(感傷主義), 가족 간의 예의범절(禮儀凡節) 등도 깊이 있게 다룬다. 그는 부부간의 성생활을 너무 진지하게 하는 폐단도 지적한다.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고 먹고 마시는 식생활같이 여기라고 한다.
루이스는 사랑을 탐구하기 위해서, 즉, 철학적인 논술을 위해서 사랑을 필요의 사랑 (Need-love), 선물의 사랑(Gift-loves), 감사의 사랑 (Appreciative love)으로 분류하고 이 용어를 사용한다. 또 필요의 즐거움 (Need pleasures), 감상(感賞)의 즐거움 (Appreciative pleasures)이란 용어도 사용한다. 이들 용어의 정확한 이해 없이는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써서 선물의 사랑과 필요의 사랑을 설명한다. “선물의 사랑에서 전형적인 예는 한 가장이 정작 자신은 함께 누리거나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지만 가족의 미래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획하고 저축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반면, 외롭고 겁먹은 아이가 엄마 품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은 필요의 사랑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23, 24쪽).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누가 무엇을 신기(神技)에 가깝게 잘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찬탄하고 기뻐하고 즐긴다. 그리고 감사한다. 이것이 감상의 사랑이다.
욕망이 생겨서 그 욕망이 충족될 때 얻는 즐거움이 필요의 즐거움이다. 심한 갈증이 날 때 물을 먹고 얻는 기쁨이 그것이다. 욕망 없이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것이 감사의 즐거움이다. 저자는 이 감사의 즐거움을 이렇게 묘사한다. “찾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떤 좋은 냄새-마침 아침 산책길에 만날 수 있는 어느 콩밭의 냄새이나 잘 익은 sweet-peas 냄새-를 맡게 될 때 얻는 즐거움이 감사의 즐거움이다.”
필요의 즐거움과 필요의 사랑은 유사점이 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즐거움, 즉 필요의 즐거움과 감사의 즐거움의 중요성은 인간의 사랑의 특징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필요의 즐거움처럼 필요의 사랑도 그 필요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루이스는 “다 자란 자식들이 자기를 홀대한다며 원망하는 어머니들의 한숨과 필요가 가시자 관계를 끊어버린 남자에 대 한 정부(情婦)들의 원망이 세상에 가득한 이유를 필요가 사라지자 동시에 사랑도 사라지”는 사랑의 속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36쪽).
루이스는 위와 같이 분류하고 정의한 사랑의 종류와 기쁨의 종류를 이용해서 애정, 우정, 에로스, 자비를 더 사변적으로 탐구한다. 그리고 이 사랑들의 덕성과 피해도 다룬다. 그는 네 가지 사랑에 대한 논술 전에 자연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루이스는 자연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연은 제게 영광과 무한한 위엄의 어떤 하나님이 존재함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자연은 영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자연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하나의 종교로 세워지면 신이 되기 시작하고 따라서 악마가 되기 시작합니다.” (45쪽).
루이스는 애국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쇼비니즘(Chauvinism,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애국주의)을 떠올리면 그의 부정적인 시각을 곧 이해하게 된다. “나라에 대한 사랑은 신이 되는 순간 악마가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원래부터 악마였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애국심과 비슷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자기 학교, 자기 부대, 자기 가문, 자기 학급, 어떤 교파 내의 분파나 어떤 종단 같이 자연적 애정 이상을 요구하는 조직들에 대한 사랑”이 그것들이다. 너무 치우진 이런 사람들은 문명의 발전이 아니고 퇴보라고 주장한다. 무엇이든지 너무 많으면 그 풍부함과 넘침은 악이고 독이다. 사랑이 만병통치약 같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독이 들어있다.
애정이란 어떤 사랑일까? 루이스에 따르면, “사랑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널리 퍼져있는 사랑, 사람에게서나 동물에게서나 별반 차이 없이 보이는 사랑이 애정입니다. 인간은 동물적 특성을 가졌습니다.” 그는 애정을 “헬라어 사전에는 애정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라고 정의 합니다. 물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애정도 포함됩니다. 아기를 보살피는 어머니 모습이 그 이미지입니다. 보금자리에서 새끼들을 품고 있는 암캐나 어미고양이 모습, 서로 비벼대고 찍찍거리고 그르렁거리고 핥고 옹알대는 새끼들의 모습, 젖이나 따스한 어미 품이나 젖비린내 같은 것을 말입니다.”라고 묘사한다. (44쪽).
이 애정은 필요의 사랑이기도 하고 선물의 사랑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출생을 부여하며, 젖을 물리고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또 한편 태아를 출산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됩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자신이 고통 받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어머니의 애정 역시 필요의 사랑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필요의 사랑이지만 그 필요한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 필요입니다. 그것은 선물의 사랑이지만 그 대상의 필요를 필요로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도 역설인데, “필요를 필요로 하는 사랑”이란 말에 주목하라.
루이스는 애정은 “사랑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덜 까다로우며 가장 폭 넓은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애정은 사랑 중에서 가장 본능적인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동물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애정의 질투심은 그만큼 격렬하다.”고 분석한다. 애정의 사랑에서 그 애정이 필요의 사랑인 점에서 그 사랑이 탐욕스러울 때는 많은 문제점을 일이키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 그 애정이 선물의 사랑이란 점에서도 그 애정은 심하게 왜곡 될 수 있다.
루이스는 애정의 왜곡된 상태를 피제트 부인의 가족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부인은 늘 말하기를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했고 그 이웃들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죽자 그 가족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모른다. 놀라울 지경이었다. 남편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졌다. 그는 웃기도 했다. 늘 불만 가득하고 신경질만 부리던 작은 아들은 인간성 좋은 아이로 밝혀졌다. 집에 붙어있지 않던 아들은 집에 있고 정원을 손질했다. 허약한 줄로만 알았던 딸은 승마 연습을 하러 다니고 밤새 춤을 추고 몇 시간이고 테니스 연습을 했다. 데리고 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외출이 금지된 개는 동네 골목을 주름잡는 유명인사가 됐다.” (92쪽). 이 피제트 부인의 모성 본능에 억압됐던 식구들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과 개가 해방됐기 때문에 그 가족은 새로운 생활을 맞은 것이다.
가족에게 애정을 잘 못 퍼부은, 선물의 사랑을 잘 못 사용한 피제트 부인은 이런 여인이었다. “한 사람이라고 집에 있으면, 따스한 점심을 마련했다. 한 여름 밤에도 따스한 음식을 미련했다. 식구들이 찬 음식을 좋아한다고 항변해도 계속했다. 밤늦게까지 귀가 하지 않으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2-3시까지 기다렸다. 식구들은 그 힘없고 창백하고 피곤에 지친 얼굴을 봐야했다. 무언의 비난과도 같은 그 표정을 봐야 했다. 늘 무언가를 손수 만들었다. 재봉사요 뜨개질 선수였다 그녀가 만든 옷을 안 입을 수 없었다. 그 부인이 죽은 뒤 그 가족이 자선에 내놓은 옷이 교구의 전체 기증보다 많았다. 가족의 건강은 그녀가 다 맡았다. 허약한 딸아이의 건강을 위해 병원에 안 가고 항상 자정의만 불렀다. 정작 의사는 환자와 대화를 못 나누었다. 특별 보양식을 만들어주고 끔찍한 강정제를 먹이고,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여인이었다. 가족은 그녀를 도와야 했다. 자신들은 원하지도 않는 일들을 지신을 위해 할 수 있도록 그녀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개에 대해서는 자식을 다루듯 했다.” (90쪽).
루이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쓴다. “모성 본능이 자칫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모성애는 선물의 사랑이지만, 무언가를 줄 필요가 있는 사람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필요로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는 일의 진정한 목표는 받는 사람이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먹이는 것은 머지않아 그들 스스로 먹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머지않아 그들이 우리의 가르침이 없이도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선물의 사랑에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사랑은 포기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합니다. “그들에겐 내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하게 되는 시간을 보답으로 여겨야 합니다.” (92쪽).
루이스는 “애정은 상식과 공정한 주고받기와 선량한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낳는다.”고 말한다. 애정은 완전한 사람인가? 아니다. 사랑에는 상당한 증오가 담겨 있다. “만일 애정이 삶의 절대 주권자가 되면 그 씨앗은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신이 되어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고 루이스는 말한다. (109쪽). 애정은 자비로 승화돼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사랑이 된다.
우정은 친구 간의 사랑이다. 이성(異性) 간에도 우정은 있다. 우정에 대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루이스에 따르면, 고대와 중세에는 우정을 높이 평가했으나 현세는 우정을 중요하시 않고, 아예 우정은 사랑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동성애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그는 우정은 1) 가장 덜 태생적이고, 2) 가장 덜 본능적이고, 3) 가장 덜 육적이고, 4) 가장 덜 필수적이고, 5) 가장 덜 생물학적이고, 6) 가장 덜 군집 본능적이라고 주장한다. 루이스는 우정이 애정이나 에로스에 필적할 만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천국에서 발견되는 천사들의 사랑에 비유한다.
루이스는 우정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우정의 질병은 군중으로부터 일탈하고, 동아리 간의 집단적 우월감에 빠지고 외인을 배제하는 것이다. 우정은 선천적으로 교만에 빠져들기 쉬운 속성을 가진다. 그는 우정이 서로 치켜 세워주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겸손이 필요한 사랑이다. 우정도 자비로 승화돼야 완전한 사랑이 된다.
에로스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루이스는 이 책 159쪽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에로스란 소위 사랑에 빠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연인들이 ‘빠져드는’ 그런 종류의 사랑 말입니다. 그는 에로스에 내재한 육적이고 동물적인 성적 요소를 비너스(Venus)라고 부른다. 그는 에로스를 설명할 때, 그가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일반인이 말하는 그런 성이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 혹은 모든 인간이 고유하는 것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에로스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적 변이성(變異性)으로서의 성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성이 개입된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그 성 자체가 에로스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성은 에로스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청춘 남녀가 한 눈에 서로 반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본다. 불륜의 남녀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것도 우리는 본다. 이런 사랑이 에로스다.
에로스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을 그 짝으로 맺어준다. 많은 불행한, 불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결혼이 연애로 한 결혼이고 에로스로 결혼한 경우이다. 상대방과 결혼하지 않아서 오는 행복을 즐기기 보다는 그와 결혼해서 얻는 불행을 택하겠다는 사랑이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랑이기도 한데, 이 못 말리는 사랑은 “사랑 중에서 그 수명이 가장 짧은 사랑이다.” (187쪽).
루이스가 사용하는 에로스는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그런 육적인 사랑이 아니다. 성적 욕망의 충족은 2차적인 것이다. 남자가 한 여인을 에로스 사랑을 한다면, 그는 그 여인이 주는 성적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여인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에로스는 한 남자로 하여금 단순히 여자가 아니라 특정한 여자를 원하게 만듭니다. 불가사의 하지만 확실히 그는 그 여인 자체를 갈망하는 것이지, 그녀가 줄 쾌락을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164쪽).
루이스는 에로스를 이렇게 찬양한다. “에로스의 전적인 헌신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에게 행해야 하는 사랑의 패러다임 내지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에로스의 최고 경지는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신을 닮았습니다.” (188쪽).
에로스는 필요의 사랑일까? 아니면 선물의 사랑일까?. 루이스는 에로스가 오직 필요의 사랑으로 타락할 때의 악마 성을 이렇게 기술한다. “사랑 안에 있는 미움의 독으로 서로를 괴롭히며 각자 받는 일에만 혈안일 뿐, 주기는 한사코 거부하며 서로 질투하고 의심하고 분을 품고 휘어잡으려 하며 자신은 자유로워지려고 하면서 상대에게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키는, 그렇게 서로를 고문하는 두 사람을 무자비하게 계속 함께 묶어 두면서 말입니다.” (195 쪽). 에로스가 악마로 변할 때는 실로 끔찍하다. 이 사랑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비로 승화돼야 한다.
루이스는 사랑 그 자체이신 그 사랑을 자비라고 부른다. 그에게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 그래서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는 애정, 우정, 에로스와 같은 그런 사랑과 달리 자비는 완전한 사랑이다. 하나님만이 할 수 는 사랑이다. 물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할 수 있다. 인간들이 나병환자, 범죄자, 저능아, 자기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먹는 것과 입을 것을 우리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물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떠한 욕망이 없으며, 다만 주고자 하는 풍부함이 있을 뿐입니다. (215쪽).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순전히 사랑으로써 존재케 하십니다. 피조물을 사랑하고 완성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16쪽). 감히 생물학적인 이미지를 써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일부러 기생물을 창조하셔서는, 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宿主)’ 이십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랑의 발명자이시자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216쪽). 위 따옴표 속의 글은 루이스가 쓴 그대로이다. 이보다 어떻게 더 잘 하나님의 사랑을 그릴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뜯어 먹고 사는 기생충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그에 대한 확실한 이미지를 얻었다. 이 책은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의 필요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필요를 위한 것인지를 살펴보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그런 사랑은 하지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제트 부인과 같은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선물의 사랑이 그 선물의 사랑을 받는 이에게는 고통과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손자와 손녀를 사랑할 때는 그들이 나의 선물의 사랑을 기뻐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살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나의 사랑이 필요 없다는 때가 오면 그들 옆에도 가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눈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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