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레닌의 전기를 읽고 (독후감)

김일중 2021. 8. 14. 03:25

레닌의 전기를 읽고 (독후감)

2021년 8월 14

김일중

 

한국 고래의 건축 양식으로 지은 집이 한옥(韓屋)이다. 이 한옥을 지으려면, 토목, 건축, 기계, 토지, 임야 등의 구조나 설계 등을 제도기를 써서 기하학적으로 그린 그림인 도면(圖面)이 있어야 하고, 또 이 도면에 따라 집을 짓는 목수(木手)가 있어야 한다. 목수는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목공이라고도 한다.

 

국가를 하나의 집으로 비유한다면, 칼 마르크스 (Marx, 1818-1883)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이라 부르는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도면을 만든 설계자이고, 레닌은 이 도면에 따라 1917년 공산주의라는 목재를 사용해서 나라를 지은 목수이다. 레닌은 처음으로 이 땅에 공산주의 집을 지은 혁명가이다. 그런데 이 집은 엉터리 설계에 의한 엉터리 집이라서 이 가옥 (공산주의)“1989년에 동유럽에서, 1991년에는 소련에서 해체되었다.” (따옴표 안의 글은 이 책의 17쪽에서 인용한 것이다.)

 

내가 읽은 레닌의 전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레닌은 특출한 인물이었다. 레닌은 아무도 예상 못한 인물이었다.” (17). 이러한 저자의 첫말은 레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으나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태어남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재앙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Vladmir Ilich Ulyanov Lenin)54년의 삶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870: 출생

1897: 3년간 시베리아에서 유형(流刑)을 당하다. 유형은 죄인을 외딴 곳으로 보내어 그 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이 때 정부는 그곳에서 살 생계비를 준다.

1900:독일에 망명

1905:귀국했다가 그 해에 다시 스위스로 망명. 파리, 츄리히, 베를린, 런던 등에서 12년간 유럽에서 망명 생활.

1917: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主導)하기 귀국. 혁명을 주도하여 집권하다. 혁명의 선봉장 역할을 하다. 사가(史家)들은 그가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한다.

1924: 혁명정부의 우두머리로 러시아를 7년간 통치하다가 54세 때 지병으로 사망.

 

러시아 왕정은 레닌을 처단하기 위해 레닌 체포에 20만 루블의 현상금을 붙였다.” (480).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다. “인민은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는다. 물질적 보상의 차별은 없을 것이다. 각 개인은 잠재적 재능을 발달시킬 충분한 기회를 최대한 누리게 될 것이다. 사람은 정신적인 노동과 육체적인 노동을 다 할 수 있다. 전체 인민은 독자적으로 행정에 참여할 것이다. 전문적인 정치가 계층, 전문적인 관료 계층, 전문적인 군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각료들이 내리던 결정을 가정부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가 다가옴에 따라 국가는 사멸될 것이다. “ (486).

 

레닌에게 의회주의는 더러운 것이었다.” (488). “레닌은 자유민주주의같은 단어를 경멸적 어감을 담아 사용했다. 그는 입법, 행정, 사법 당국 사이의 권력 분립 같은 개념을 비웃었다.” (488). “레닌은 언론 자유는 부르주아들에게 이익이 되는 원리라고 거듭 주장했다.” (518). 그는 국가의 통치에서 독재와 폭력을 옹호했다. “레닌은 지시하고 명령했으며, 노골적인 국가 테러를 비롯해 폭력의 사용을 승인했다.” (522). “레닌은 경제의 급격한 악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정부의 규제로 금방 역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522).

 

레닌은 나라의 재앙을 일으키는 주요 범죄자는 기업가, 은행가, 농업 지주라고 단언했다.” (445) “레닌은 부르주아 도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으려고 했다.” (565). 그는 농민들의 채마 밭도 국유화하기를 바랐다. 레닌은 부유한 시민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첵카(비밀경찰)를 설립했다. (569). 그는 통치를 하면서 독재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점점 다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569). 레닌이 정의하는 독재는 어떤 법률에도 구속되지 않는 힘에 직접 의존하는 권력이다.” (604). 그의 독재는 절대 권력을 의미한다.

 

레닌의 사고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했고, 필요한 것은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특정 행동이 혁명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의 여부였다. 그의 공식 철학은 민주주의의 사회의 공정함, 정의 같은 보편적 목적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에 경멸감을 드러냈다.” (571). “레닌은 노동 계급에 유리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다.” (570). 그는 자본주의 국가는 곧 다 망하고, “사회주의가 세계 전역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626).

 

레닌은 혁명 후에 사람들이 일정한 부류에 속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죽였는데, 땅을 빼앗긴 부농들과 반대자를 살해할 때 아래와 같은 편지로 명령했다. (589). 이 편지의 내용은 너무 잔인하고 레닌이 살아있을 때는 공개되지 않았다.

 "클라크, 부자, 흡혈귀라고 알려진 적어도 100명의 사람들의 목을 매달 것. 사람들이 충분히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매달 것.

그들의 이름을 공개할 것.

그들로부터 모든 곡물을 압수할 것.

어제 보낸 전보에 따라 인질들을 선정할 것.

피를 빨아 먹는 클라크들을 볼셰비키가 목 졸라 죽이고 있고 앞으로도 목 졸라 죽이리라는 것을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놀라 부들부들 떨고 소리치도록 그렇게 하시오. 레닌." (589쪽)

 

레닌의 아버지는 교육공무원으로 장학관이었다. 그는 49세 때 은퇴했고, 53새 때 죽었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재능 있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81세 때 죽었다. 레닌의 부모는 아이를 6명울 낳았으나 4명만이 성인이 되었다. 레닌을 어머니가 직접 레닌을 교육하기도 했고, 가정교사가 교육하기도 했다. 물론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레닌은 러시아인의 피를 받은 흔적이 없다. 레닌의 외할아버지가 유대인이었다. 레닌은 자신의 집안에 존재하는 유대인 요소를 자랑스러워했다.” (61).

 

레닌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났다. “학생 때 전반적으로 태도가 긍정적이었고 성적이 뛰어났다. 그는 즉시 자기 학년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가 되었다.” (79). 그의 형제자매는 다 공부를 잘 했다. (알렉산드로)이 하나, 누나(안나와 올가)가 둘, 남동생 (드미트리)이 하나, 여동생 (마리아)이 하나가 있었다. 남동생은 의사로 생을 마쳤고, 여동생은 혁명에 가담해 레닌을 도왔다.

 

레닌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시험을 보고 입학했고, 대학도 러시아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입학했으나 공산주의 운동을 하느라 대학 1 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독학으로 자격시험에 합격해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누나 올가는 의사가 되려고 노력했으나, 장티푸스로 19세 때 죽었다. 이 누가가 죽은 날, 그의 형은 러시아 황제를 암살하려는 단체에 연루되어 체포돼 20세 때, 1887년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어머니가 그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려고 황제에게 탄원했으나 거부되었다. 그의 형은 당시에 러시아에서 제일 좋은 상투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했다.

 

레닌이 16세 때에 그의 형이 교수형을 당한 것이다. 이 형이 죽었을 때, 레닌은 10과목의 시험을 보았는데 각 과묵마다 모두 5점 만점을 받았다. 이는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흔들림 없는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와 그의 부인 뿐 아니라 네 딸과 혈우병을 앓던 아들 그리고 하인 몇 명이 희생됐다.” (586). 레닌이 그의 형을 죽인 황제 일가를 죽인 것이다. “죽은 황제일가에게는 레닌이 적그리스도였다.” (586). 형이 교수형을 당하자 레닌 일가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대접을 받았다.” (586).

 

레닌은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었지만, 카롤 마르크스와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사랑에 빠졌다. 이 젊은 이성애자 혁명가는 여성보다 이데올로기(이념)에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지도적인 주창자들에게 더 흥분했다.” (181). 레닌의 기독교 신앙은 16세에 사라졌다. “레닌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무조건 무신론을 따라야한다고 여겼다.” (254). 그는 종교인들을 박해했다.

 

레닌은 성격이 전투적이었다. 그는 전투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논거를 세우고 전투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대단한 능력을 기니고 있었다. 그는 타협을 입에 담기 어려운 더러운 말로 취급했다.” (449). 그는 일찍이 대머리가 되었는데 아버지를 닮은 때문이다. 아버지가 뇌일혈로 53세에 죽었는데, 그도 그런 병으로 54세에 타계했다.

 

레닌은 항상 단정한 필기체로 글을 썼다. 연필은 항상 무섭도록 날카롭게 깎았고, 책상은 항상 가지런히 정돈했다. 책상은 매일 치웠다. 그는 낭비를 몹시 싫어했다. 여백이 있는 편지를 받으면 빈 부분을 오려서 간수했다. 돈을 쓰는 데에 매우 신중했다. 그는 극심한 만성 위통에 시달렸고, 두통에 시달렸다. 밤에는 잠을 자기 못했다. 심한 불면증에 늘 시달렸다. 만성피로도 그를 늘 괴롭혔다.

레닌은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만난 나데즈다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결혼했다. 그는 해외 망명지에서나 러시아 국내에서 장모와 늘 함께 사이좋게 살았다. 장모의 어머니가 유산을 많이 남겨 이 유산이 레닌에게 금전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레닌이 유럽 망명 중에 열열한 공산주의 자인, 한 젊은 과부(아데사 아르망)가 있었는데, 그녀가 레닌한테  반해 그를 유혹해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기도 했다. 그의 아내가 이를 알고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해, 셋이서 한 집에서 살기도 했고 떨어져 살기도 했다. 레닌은 소생이 없어 아데사의 자녀를 사랑하기도 했다. 레닌은 끝까지 남편의 도리를 다했다.

 

내가 읽은 레닌의 전기는 로버트 서비스가 지었고, 김남섭이 번역했고, 출판가 교양인이 2017125일에 출간한 847쪽으로 구성된 서적이다.

 

나는 이 전기를 읽고, 레닌이 마르크스의 잘못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잘못된 공산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레닌은 공산주의 엉터리 도면에 따라 엉터리 공산주의 집을 지은 엉터리 목수이다. 공산주의 집을 짓고 사는 북한을 보라. 그 집이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상천국이냐? 레닌 같은 이가 다시 태어날가 두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