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김남흥의 회고록을 읽고 (독후감)

김일중 2022. 6. 1. 05:47

김남흥의 회고록을 읽고 (독후감)

(대전고 40회 동창회 채팅방에 올린 글)

202261

김일중 

 

196463일에 일어났던 대일 굴욕외교 반대에 관여한 우리의 친구 김남흥은 64일 아침 경찰에 체포된다. 교도소에 들어간다. 그는 그해 11월 중순에 무죄 석방 된다. 그는 이 사건을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쓴다. “그러나 출옥 후 나는 고대(高大)는 물론 대한민국 학생운동에 연루 되어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략). 고대에서는 나를 정신적인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회고록 124쪽에서 인용). 그는 그 고대 데모에서 그가 행동대장이었다고 술회한다.

 

나는 올해 410일에 김남흥이 우송한 그의 회고록, “용서에서 용기를, 원망에서 희망으로라는 책을 받고 읽었다. 그 책은 235쪽의 책이다. 그 책은 글 쓰는 이가 대필한 것이 아니고 그가 직접 쓴 것 같다. 나는 아직 그의 선물을 받았다는 감사의 말을 그에게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독후감으로 그의 후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성공적인 삶과 그의 행복한 노후 생활을 기뻐한다.

 

김남흥은 그의 책에서 그의 사업이 비교적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지금 나는 사업을 해서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60). 그리고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21녀에 손주 넷을 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이다. (210). 그는 그의 고향 논산에 30,000평 넘는 토지가 있다. 그가 산 땅이다. 그는 주말에 농사를 짓는다. “나는 2012년 이후 매주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꼬박 10년을 고향집에 내려가 직접 과일 농사를 지어서”. 그의 말이다. (228),

 

책에 기록된 그의 약력을 내가 더 줄여보면 아래와 같다. 논산중, 대전고, 고려대 생명환경공학과, 해병대 대위 제대. 월남전에 참전, 한국 농약() 영업 상무, 1991년 동양 솔라 창업. 광고회사를 운영하다 부동산 임대업을 함께 하여 거금(巨金)을 벌었다. 거금이란 단어는 내가 선택한 단어이다. 책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20049월에 지하 5, 지상 15층 규모의 송암 빌딩III 건물을 준공했다.” (205). 이 빌딩은 강남에 있다. 이와 같은 빌딩은 저 명동에도 있다. 모두 일곱 채가 있다.

 

그는 현대자동차의 정세영 고대교우회 회장 밑에서 사무총장, 부회장을 역임했다. 젊은이가 부회장이 됐다고 신문에도 보도됐다. 그는 대학 재학 때 매우 똘똘했던 것 같다.

 

김남흥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매우 가난했고 불행했다. 아버지가 성실하지 못했고, 노름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할머니와 그녀의 자식들이 김남흥과 그의 어머니와 35녀인 그의 가족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때의 그 가난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거지가 아니었지만 거지였다.” (17).

 

그의 회고록에는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글이 있다. 나는 엿 사 먹을 돈을 다 모아서 토끼를 샀다. 토끼는 번식력이 강해서 1년에 몇 번씩 새끼를 낳는다. 그러면 그 새끼를 팔았다. 토끼 새끼를 팔아 점점 돈이 모이면 이번에는 닭을 샀다. 그리고 닭을 키워 팔아서 비료를 사다 장리(長利)를 주었다. , 봄에 비료를 꿔주고 가을에 받을 때는 한 해 이자로 비료 값의 절반 이상을 더 받았다.” (60). 그는 어려서부터 사업가 기질이 있었던 같다. 그가 오늘의 큰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타고난 재주와 노력 때문인 것 같다.

 

그의 회고록에는 이런 기술(記述)도 나온다. “고등학교 진학 후부터 나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81) 그는 실제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학년 때의 우열반 편성에서 1등에서 60등 안에 드는 반에 편성됐다. (82). 그의 지능지수가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그는 고교 때 신문 배달을 했다. 학교 도서관 사서를 했다. 입주 가정교사를 했다. 그는 가정교사로 박관수 교장 선생님의 손자를 가르쳤다.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썼다. “가정교사를 시작한 후 여러 집을 돌아다녔고, 특히 교장 선생님 손자들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85). 고아원에 들어가 숙식도 해결했다.

 

고대에 들어가서도 학비는 그가 번다. 놀랍게도 그는 학교 다니면서 아우와 함께 공부와 사업을 같이 해서, 즉 쌀장사와 잡화 장사를 한다. 그리고 큰돈을 번다. 남흥상회가 그가 세운 가게 이름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고려대 다니는 총각 선생은 어마 어마하게 돈을 벌었다.” (108)

번돈을 함께 장사하던 아우가 다 가지고 사귀던 여자와 같이 도망가고, 아버지의 노름 병이 도저 그가 번돈을 다 날려버리는 바람에 남흥상회는 문을 닫았다. 이 파산을 계기로 그는 그룹 가정교사로 나서서 학업을 마치었다. 그는 명가정교사라는 평판을 얻었다.

 

책의 저자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구사일생(九死一生)했다. “월남으로 간 고등학교 동기생 해병대 장교 4명 중 3명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건 나 혼자였다.” 그의 말이다. (165). 그는 일반 사람들이 월남갔다 왔다고 하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말이라고 강조하면서 그가 받은 혜택은 월남에 있는 동안 우리 장교들한테 지원된 건 1년에 보리쌀 한 말 정도였다고 밝힌다. (164). 보리쌀 한 말이다. 그것도 1년에. 너무 적은 돈이다. 월남에서 돈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말한 한 택시 운전수를 그가 분노하여 두들겨 패는 장면이 책에 나온다.

 

그는 책의 중반을 넘어서는 한국농약에서의 직장 생활을 말하고 이어 그의 창업과 회사 경영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가 살아오면서 도움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 하고 고마움을 나타낸다. 글이 길어져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글을 줄인다. 그는 21녀의 자식을 잘 키웠다. 사진 속의 그의 두 며느리들은 품위 있고 기품이 넘친다.

 

우리의 친구, 김남흥 동양 쏠라 () 사장의 회고록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회고록의 출판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