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청동 불상이 웃다니?

김일중 2008. 10. 15. 16:32

웃으신 부처님    

 

김 일 중

1995년 5월15일

 

내가 근무하는 회사 뒤에는 산이 있다. 삼태기 같은 이 산이 회사를 감싸고 있다. 이 산에는 유난히 아카시아 나무가 많다. 이 아카시아 꽃들이, 5월이면, 장관을 이룬다. 감미롭고 향긋한 아카시아 꽃 향기와 주위의 싱그러운 신록이 회사의 주변을 극락국토 (極樂國土)로 만든다. 이 5월의 어느 날,  나는 나의 회사 사장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예배하면, 어떤 때는 부처님이 환하게 웃으시지라고. 사장 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신도회 회장 직무대행을 지내신 분으로 포교사 (布敎師)다. 이 사장님이 예불을 하면, 어떤 때는 환하게 웃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었던 그 때, 나는 불상이 웃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도 법당에서 웃으시는 부처님을 난생 처음으로 보았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구룡사 (九龍寺)에서였다. 이 날이 나에게는 기쁜 날이라서, 지금도 이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1993년 9월 12일 오후 두 시경이었다. 이 날 나는 엷게 웃으시는 부처님을 본 조용한 기쁨 때문에, 법당에 오래 앉아 있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지금도 웃으시던 부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구룡사 (九龍寺) 만불전(萬佛殿)에는 일곱 분의 앉아계신 큰 부처님과 사방 벽에 일만 (一萬) 분의 작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큰 부처님은 보승여래불, 약사여래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여래불, 아미타불, 부동존여래불인데,

석가여래불만 웃으시지 않고, 여섯 부처님이 나를 보고 잔잔하게 웃으시었다.

이들 큰 부처님과 함께 나무로 조각된 작은 두 분의 관세음보살이 계셨는데,

이 두 보살님은 웃음을 애써 참으시는 것처럼 입의 양 꼬리를 많이 올린 상태로 웃으시었다. 왜 부처님이 웃으실까 골똘이 생각하면서, 나는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부처님을 일일이 바라보았다. 방향을 바꾸어 바라보아도 여전히 부처님은 웃고 계셨다.

 

법당에 앉아 있는 불상이 웃는다는 일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상이 웃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들의 마음의 차이에 따라서 세계가 변한다는 유식불교 (唯識佛敎)의 주장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작은 어려움인데도 아주 크게 괴로와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반면, 아주 큰 괴로움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질 넘기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이는 유식불교의 실상(實相)과 관련된 일이다.

 

곰보도 보조개란 말이 있다. 갑돌이는 갑순이를 사랑한다. 그런데, 갑순이는 곰보다. 그러나, 갑돌이는 갑순이의 곰보를 곰보로 보지 못하고 보조개로 본다. 갑돌이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이 곰보를 보조개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이 다르면, 같은 사물도 서로 다르게 본다. 갑돌이 에게는 애초에 곰보는 없고, 보조개만 있다. 불교는 모든 중생이 갑돌이 처럼 모든 것을 잘 못 보고,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고 가르친다. 본래 이 몸도 없는 것인데,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한다.

 

잘 못 보고, 다르게 보는 예를 더 들어 본다. 중이 미우면, 가사(袈裟: 스님이 입는 옷)까지 밉다는 말이 그것이다. 스님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갖고 있으면, 스님이 입는 옷까지 밉게 보인다. 가사는 천 조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별로 미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스님이 미우면 가사까지 미운 것이다. 나는 나의 아내가, 묽은 똥을 싸는 젖먹이 아들의 똥을 손으로 찍어 맛보는 것을 본적이 있다. 설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한 것이다. 나는 이를 보고 어머니들의 모성애를 크게 찬탄했는데, 나의 아내에게 있어 아들의 묽은 똥은 그저 똥이 아니고, 맛 볼 수 있는 음식 같은 것이었다.

 

흔히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할까? 절에 가면 마음이 부처란 말을 듣는다. 우주는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말도 듣는다. 내가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말하는 것 같이 미안하지만, 마음을 한자 (漢字)로 바꾸면, 의식(意識)이다. 죽은 사람을 보고 우리는 의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 의식이 마음이다. 수술하려고 마취를 시켜놓으면, 어떤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욕을 하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마음이 하는 일이다. 달나라에 인간이 갔다 논 것도 마음이 한 짓이다. 의식 (意識)이 한 짓이다. 이 의식은 우리가 죽어도 소멸하지 않는 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사후(死後) 세계를 말하는 종교는 이 의식의 불멸을 믿는 것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여덟 가지 식(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 것이 저 유명한 8식(八識)인데, 스님의 설법을 들은 이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안식 (眼識),이식 (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등 오식(五識)과 의식(意識)인 6식, 말라식, 아뢰야식, 암말라식(識)등 제7식, 제8식이 그 것들이다. 우리들이 보통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맛고, 맛보고, 촉각으로 느기는 것과 으식을 포함한 것이다.

 

꽃을 보는 것도 마음이고, 음악을 듣는 것도 마음이다.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마음이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다. 참선을 하다 보면, 천 명의 부처가 나타나기도 하고, 귀신이 보이기도 하는 마경(魔境)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도 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나 무생물까지도 마음을 가지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마음의 차이에 따라서 세계가 변한다는 말은 (불교의 가라침은) 더 인상적으로 표현 하기 위해 불교경전에 있는 일수 사견 (一水 四見 : 먹고 마시는 물을 4가지 다른 것으로 본다) 이란 비유를 여기에 인용한다. 세친 (世觀, 세친으로도 읽고, 세관으로도 읽는다.) 보살이 쓴 구사론 (俱舍論)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경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물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물이다. 그러나, 이 물이 물고기에게는 그가 사는 집으로 보이고, 하늘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보석으로 보이고, 지옥 중생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각각의 중생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물이 각각 다른 물질로 보인 것이다.

 

각자의 마음의 차이에 따라서, 그 차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맛이 나고, 다르게 냄새 나고, 다르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그렇게 된다는 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고, 절망이 있다. 가을 달이 슬프게 보일 때, 기쁘게 보려고 해도 안되지 않던가.

갑돌이가 갑순이의 보조개를 곰보로 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곰보로 보이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마음의 노예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노예인 것을 알면, 큰 슬픔을 작은 슬픔으로 보낼 수 있고, 큰 어려움도, 작은 어려움처럼 극복할 수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우리 주변사람들도 덜 미워할 수가 있다.

 

구룡사에서 웃으시는 부처님을 본 후에 한 일주일 지난 어느 새벽에 나는 다시 그 절에 갔다. 그러나 그 새벽에 본 부처님들은 내가 9월12일에 본 그 웃으시던 부처님들이 아니었다. 관세음보살님은 여전히 웃고 계셨으나, 두 분 부처님만 희미하게 웃고 계셨고, 다른 부처님은 평소의 미소 띤 대로였다.

뒤로 물러나 먼데서 부처님을 바라보니, 모두 무뚝뚝하게 앉아계셨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의 비꼬는 말처럼  사람들의 기도도 못 알아 듣는 듯 청동 불상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웃는 부처님을 만든 것도 나의 마음이었고, 웃지 않는 청동 불상을 만든 것도 나의 마음이었다. 극락과 지옥이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지 아니한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