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는 누구인가?
2014년 8월 19일
김 일 중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辨證家)이며 문필가(文筆家)는 영국인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898-1963) 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복음 가수는 미국인 흑인 여(女) 가수인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루이스를 사탄이라고 험담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의 여러 책을 읽으면 다른 이들이 쓴 책들이 시시하게 여겨진다.
기독교 평신도이면 누구나 위에서 언급한 존스의 설교와 책을 만나고, 루이스의 책을 읽어야 하며. 잭슨의 복음 성가를 들어 봐야 한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에 관해 글을 쓴다. 이 글은 존 피터스가 지었고, 서문강이 번역했으며, 2007년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책,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과 이안 머리가 지었고, 김귀탁이 번역했으며, 2010년 출판사 부흥과개혁사가 펴낸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이 책은 그의 전기(傳記)이다)를 읽고 쓴 글이다. 위 두 사람이 저술한 책들에 관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그들이 어떤 책인가 금방 알 수 있다. 잭슨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그녀는 노래는 참 좋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웨일스의 카티프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 중 둘째다. 그는, 영락교회와 국내와 국외(國外)에 600개의 교회를 세운 한경직 (1902-2001) 목사보다 3년 먼저 이 세상에 왔는데, 그는 1963년, 그의 나이 82세 때 소천(召天)했다. 그는 스펄전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에 이 세상에 왔다. 그가 태어나고 2일 후 무디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났다.
로이드 존스는 부모와 두 형제와 함께 웨일스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은 가난했다. 이 가난이 그의 가족이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 런던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 해에 그는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이 병원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다. 후에 그의 부인이 된 베단도 역시 이 해에 웨스트민스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1921년에 왕립 의과대학 회원 자격과 왕립(王立) 내과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약학사 자격도 취득한다. 그는 신학에 관한 학위는 없다. 정규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가정에 태어났는데, 이런 가정적인 배경과 왕성한 독서와 뛰어난 두뇌가 설교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20세 중반에 회심(回心)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 자격을 취득한 1921년 그해에 당시 영국의 최고 의사로서 왕의 주치의(主治醫)였던 토머스 호더 경(卿)의 주목을 받고 그의 조수가 된다. 그는 1925년 왕립(王立) 의학협회가 주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M. R. C. P.라는 학위를 받는데, 그가 의학계에 계속 머물러 있었더라면 부와 명예가 그를 따랐을 것이고 유명한 그리고 성공한 의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그의 고향인 웨일스의 한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 교회가 그의 설교에 매혹되어 그가 설교한 지 22일 만에 그 교회의 목사가 되어달라는 청빙을 받았다. 그는 이 청빙을 수락하고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의 길로 간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 뛰어난 의사로 촉망받던 의사, 연봉을 최소 2,50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연봉 225파운드에 허름한, 노동자가 사는 집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스승과 동료들은 매우 놀랐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고향 웨일스에서 1938년까지 12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고, 런던의 중심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영국에서는 국교인 성공회에 소속되지 아니한 교회를 채플이라고 부른다)에서 1968년까지 30년간 목회자로 일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80대가 될 때까지 영국에서 순회하면서 설교를 계속했다. 미국에서도 설교했다. 그는 영국의 두 교회에서만 40여 년을 설교자로, 목회자로 섬겼다. 그는 은퇴 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연속 강좌를 하기도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을 쓴 존 피터스는 로이드 존스가 그의 생애는 “먼저 설교에 바쳐졌다”라고 하면서 그를 설교자(說敎者)와 설교가(說敎家)로 묘사하고 있는데,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를 저술한 이안 머리는 존 피터스의 묘사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그를 설교자이면서 목회자(牧會者) 자라고 묘사한다. 사전에 따르면, 설교자와 설교가를 어떤 일의 견해나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이고,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신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때, 로이드 존스를 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는 예배가 끝나면 항상 광고를 통해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를 찾아오라고 하였고 모든 사람을 언제나 직접 만나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를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설교자들의 황태자’, ‘최상의 설교자’, 20세기의 사도’라고 부르는데, 그의 전기를 쓴 이안 머리는 ’종교 개혁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휫필드(G. Whitefield), 스펄전(C. H. Spurgean) 그리고 찰머스(Chalmers)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캔달 박사는 로이드 존스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의심 할 여지 없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다”라고 평했다.
신학교육을 전혀 받지 아니했던 스펄전도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그의 신도 5,000명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했고, 그들의 개인사(個人事)를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로이드 존스의 기억력도 뛰어나서 성경 전체를 다 꿰들어 알고 있어서 그의 지식은 백과사전적이었다, 그의 기억력은 5년 전에 만난 사람들의 얼굴뿐 아니라 대화 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도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학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성경의 근본을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뛰어났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설교자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설교했고, 지금도 설교하고 있다. 만일 하느님의 은혜가 허락한다면, 계속 설교할 것이다. 가난하고 지치고 주저하는 영혼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인도하여 그 임금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설교는 큰 신비입니다. 가장 신비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설교가 신비라고 밝히는 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 결과이고 여기에 정확히 신비가 시작됩니다”라고 말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것을 조종하지 못한다고도 주장했다.
그가 설교할 때, 신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설교는 설교 현장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청자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설교는 한 번만 들어도 1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그런 명설교였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가 휫필드와 같이 “강단에서는 사자를 닮았고, 강단 밖에서는 어린양을 닮았다”라고 평한다.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권위 있었고, 성경적이었고, 분석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고, 실천적이었고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였다고 증언한다. 로이즈 존스는 참으로 비범해서 복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자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에 대하여 어쩌나 담대하고도 확신 있게 증거 하는지 정말 놀라웠다고 기술한다. 예리한 그의 지성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그의 탁월한 그의 능력이 설교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였고, 청자들에게 주의의 산만을 허용하지 않는 설교였으며, 언어적으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영향을 준 설교였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으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는 그의 설교에 심한 혐오감과 반감을 품고 다시는 그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시 찾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저 시골 먼 곳에서 런던의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의 교회,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구약성경이 현대 기독교에 해로운 영향을 준다고 무시하는 풍조가 난무하던 당대에, 로이드 존스는 이런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구역 성경은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신적 계시로 보았다. 그는 구약성경이 인간의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계시하고,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무익하며,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책이라고 강조하면서 설교할 때 신약성경과 같은 비중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로이드 존스가 지나치게 성경에 의존함으로써 불필요한 요구로 청자들을 괴롭혔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로이드 존스는 세상의 조류에 맞서면서 부와 명예를 멀리한 목회자로 살았는데, 일생 단 한 번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단 한 번 TV 방송에 출연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세계 50개 국가에서 백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을 읽었는데,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에베소서 강해와 로마서 강해가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가족을 크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두 딸과 의사인 그의 아내를 크게 사랑했다. 그가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그의 아내와 결혼한 일이라고 그는 술회(述懷)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그의 가족을 두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말을 하지 못하고 필담으로 가족과 대화했는데, 마지막 대화가 그의 아내한테 한 말이, “여보 이제 하나님께 내가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요, 나 하나님께 가오"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란 직업을 버린 것을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칭찬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것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칭찬도 받아들이지 않고, “저는 설교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삶 자체가 설교의 한 부문이 되었는데,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인답게 잠자는 중에 운명(殞命)했다.
로이드 존스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돼라"라는 바울 사도의 명령을 따라 일생을 산, 역사상에 나타났던 가장 위대한 그리고 포괄적 목회 사역자 중의 하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로이드 존스의 기도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있는데, 그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항상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늘 그의 신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설교 중에 직접 밝힌,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이야기와 다시금 헌신한 사람들의 예 중의 하나이다. 존 피터즈가 지었고, 서문강이 옮기었고, 2007년 12월 15일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의 57쪽과 58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적은 것이다. 이 글에서 ‘저’는 로이드 존스 자신을 말한다.
이야기 1:
“한번은 제가 준비한 설교의 반도 못 하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주일 설교를 이미 준비한 셈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 아침에 저는 그전에 했던 설교 중 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한 편의 설교로 구성하여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하면서 특별한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쳤을 때, 한 사람이 제게 와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목사가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데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동하여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먼 데서 겨기까지 오게 하신 것은 바로 이 특별한 설교를 듣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저는 「믿음의 시련」(Faith on Trial)이라는 저의 책 서문에 이 일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복할 만큼 이 일은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 사람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만일 제가 지난 주일에 준비했던 이 설교를 끝까지 모두 전해버렸다면, 그분이 그날 들었던 그 설교까지도 이미 전 주일에 다 해 버린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어를 당했고, 그 전 주일에 제가 준비한 설교 분량의 반만 전하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 나머지 반은 그다음 주일에 전하도록 보전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처음에 그 점에 대해서 약간 석연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
이야기 2:
“저는 가공(可恐)할 죄로부터 회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한 가련한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남웨일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불행히도 낙심 자(backslider)가 되었고 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하였고, 거기서 가진 돈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설득하여 돈을 더 뜯어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자기 아내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집의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돈을 얻기 위해서 집을 팔고 아주 먼 고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돈도 다 떨어지고 그 여자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너무나 철저하게 비참하게 되고 부끄럽기도 하여 감히 자살하기로 하였습니다.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자기 가족에게 가까이 갈 권한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향해 걸어가 자신의 몸을 템스강에 던지기로 단호하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련한 영혼이 그 다리에 도착했을 때, 영국 국회의사당 시계탑에서 매시 30분에 치는 종이 울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금 저녁 예배를 위해 강단에 막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 전에 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약 6분 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도착했고,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들어서면서 ‘하나님이여 낙심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저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간구가 그가 그날 그곳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즉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런던 교외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가 되어 오랫동안 탁월하게 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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