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말씀사의 “십자가로 돌아 가라”를 읽고
2 010년 5월 15일
김 일 중
생명말씀사가 번역 출간한 “십자가로 돌아가라”를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읽다가 중간 (140피지)에서 그만두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문장들을 읽기가 참으로 고역이었다. 이 책은 모두 261쪽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내라고해서 읽어나갔는데 중간에서 읽기를 포기하였다. 나에게 공동구매해서 배부된 책은 (물론 책값은 내가 지불했다) 출판일자가 없다. 나는 이 책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출판사가 의도적으로 발행 일자를 밝히지 않은 것 같다.
생명말씀 사에 따르면, 저자 알리스터 맥그리스는 “복음주의 거장”이다. “21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책의 표지에 전병욱 목사가 쓴 글에 따르면, 저자는 “영성과 지성의 자극에 탁월 하다”. 이 책의 앞뒤 표지에 쓴 문장들을 보고 저자의 약력을 읽어 보면 누구든지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다. 그러나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 독자는 곧 실망할 것이다. 내가 독해력이 없어서 인지는 몰라도, 번역된 글이 의미 전달이 안 된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이 책은 사람이 번역한 책이 아니고 번역기가 번역한 책 같다.
이 번역서의 원제목은 The Enigma of the Cross인 것 같다. 책의 앞뒤 표지에 이 영어 구가 보인다. Enigma란 영어가 사전에 “ 수수께끼(riddle); 수수께끼 같은 인물, 불가해한 사물; (수수께끼 같은)말, 질문, 그림”으로 나와 있다. 이 원제목을 우리 글로 풀면 십자가의 수수께끼가 될듯한데, 십자가의 신비정도의 의미 일 것
같다. 이 원제목을 보면 이 책이 어떤 책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뒤표지에 이런 글이 나온다. “당신은 그리스도인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부활하신 자를 따라 스스로를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정체성 찾기를 좋아하지는 않는 가 돌아보라” 이 문장을 국어 선생의 입장이 돼서 천천히 한번 읽어보라. 이 땅에 복음 전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는 출판사가 예수님을 한자의 놈 자자로 표현하고 있다. 주어는 생략된 듯한데, 부활하신 자가 주어 같기도 하고, 감히 라는 부사의 사용도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의미 전달을 어렵게 하는 문장이다. 부실한 번역 냄새가 금방 난다.
책의 뒤표지에 쓰인 문장이 이 정도인데 이 책의 본문이 정확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원저자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책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하나를 보면 열은 안다고 싹수가 노란 책이다.
이 책의 “들어가는 말”로 된 서문을 읽었다. 이 책은 서문이 4쪽 자리이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 파악을 위해서는 저자의 서문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읽었다. 천천히 읽었어도 의미 전달이 안 되었다. “그림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림들 주의를 맴돈다. 중대한 신비, 기독교의 정체성과 적실성,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관해서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것을 가로 막는다, 십자가의 중심 성”등등 이해 안 되는 구와 문장 때문에 의미파악이 잘 안 된다.
이 책의 “들어가는 말” (머리말)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직접
읽어 보라. 나의 불평이 생트집이 아님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스타인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생가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상징이 갖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 논하면서 ”그림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바 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림들’ 주위를 맴돈다. 그 그림들은 삶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한 그림이 놓여 있다. 기독교 예술과 건축물, 문학과 시들은 ‘십자가’ 라는 상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상징은 생각과 반성을 요청하고 요구한다. 우리는 이 상징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 것은 하나님과 세상과 우리의 본성과 궁극적인 운명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중심에 죽음과 절망의 상징-십자가에 달려죽은 한 사람에 대한 두려운 그림이 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으로 십자가는, 비록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인간 실존의 명백한 무의미로 인해 절망하는 사람들-그들은 세상에서 길을 잃고 세상의 관심과 염려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신비’다. 또한 십자가는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자기만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십자가는 감히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자를 따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십자기에 달리신 그리스도보다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적실성의 근거를 찾기를 좋아하는 듯 보이는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본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는 중대한 신비를 드러내고, 그 것이 교회의 삶을 위해 갖는 의미를 지적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다. 본서는 두 부문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기독교에 있
어 십자가의 중심 성을 세우는 문제를 다룬다. 이 부분은 십자가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적실성은 십자기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그 신비의 의미를 탐구하는 내용을 다룬다. 이 신비와 더불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대면한다. 종종 십자가는 기독교 교리의 한 작은 분야-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구속을 획득하신 방법 (구원론)-로 축소 된다“
위의 따옴표 안에 든 글이 생명말씀 사에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나는 들어가는 말이라도 정확히 이해하고 싶고, 이 책이 원저자의 뜻을 잘 전하고 있는지를 확인 하고 싶어서 생명말씀 사 편집자에게 이 메일을 보내서 머리말의 이해가 어렵다는 것을 전하고, 머리말만이라도 원본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출판사로부터 원본을 두 쪽 받았고, 번역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이 메일도 받았다. 번역한 출판사와 내가 주고받은 메일을 이 글에 첨부한다.
받은 원서를 내가 사전과 씨름하면서 독해를 해보고 내가 번역한 글을 편집자에게 보냈다. 여기에 내가 그 편집자에게 보낸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 ‘상징들은 우리들을 홀려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고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 상징들의 놀라운 능력을 논하면서 이렇게 책에서 말했다. 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상징들을 이해해야하는데, 이 상징들은 생명의 신비를 열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듯하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한 상징이 존재한다. 기독교에 관한 예술, 건축, 문학 그리고 찬송가들에는 거의 모두 다 그 십자가의
상징이 있다. 그러나 상징이란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깊게 사고해야하고 심도 있는 성찰을 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 십자가에서
무엇을 이해해야 할까? 그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여주는 것 일까? 그 십자가는 우리
의 본성에 대하여, 우리의 최종 숙명인 죽음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우리를 사랑하는 한 신을 믿는 신앙의 중심에 죽음과 절망을 의미하는 한 상징이 있는 것일까? 십자가에 그 몸이 못 박혀서 죽어가는 한 남자의 그 보기에도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상징이 왜 한 신을 믿는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일까?
기독교의 그 십자가는 정말로 하나의 풀기 어려운 신비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나, 그 십자가에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겉으로 보이는 허무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이해관계와 근심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가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십자가는 또한 기독교 교회가 현재의 업적에 만족해서 발전하고 변화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도전이다. 그 십자가는 교회를 위해서 계속해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렇게 부를 자격도 없으면서 그들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을 따라가는 ‘기독교인’ 이라고 부르면서도 교회의 정체성과 그 타당성의 근거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에서 찾기보다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기를 선호 하는 것 같다.
내가 집필하는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에 있는 결경적인 신비를 푸는 하나의 시도 이고, 교회의 생명을 위한 신비의 의미를 지적한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그 십자가의 핵심을 증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십자가는 기독교신앙의 내부에서 지엽적인 문제로 전락될 수 없고, 더욱이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에 나타난다.
기독교의 본질과 그 존재의 타당성은 두 개가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그리스도와 끈으로 매어져있어 이 끈은 다시 풀 수 가
없다. 두 번째 부분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그 그리스도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 신비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받은 머리말의 원서와 출판사의 번역을 대조해보고, 이 책이 원서를 처삼촌의 묘 벌초하듯이 번역한 책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도 독후감을 써야하기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갔는데, 번역된 본문은 “들어가는 말” 보다 더 심하게 오역이 된 것 같아 (난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의미를 파악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책의 내용을 파악 못 한 이유는 내가 독해능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원저자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역자의 잘 못된 번역일 수 있는데, 이 책의 역자가 원저자의 머리말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것을 보면 후자일 기능성이 높다. 교회 다니는 내가 십자가에 대한 책을 이해 못할 이유가 없다. 책의 이해가 어렵다고 하면 어려운 책이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출판사들은 말하는데, 이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많다.
책이나 글 따위를 읽고 난 뒤의 느낌, 또는 그런 느낌을 적은 글이 독후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책의 독후감을 쓸 수가 없다. 책을 반 쯤 읽었어도 무엇을 쓴 책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편집자와 내가 주고받은 이 메일을 이 글에 첨부한다. 내가 이 책의 내용 파악을 위해 애썼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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