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을 통해 본 김영삼, 박정희를 조금도 무서워 하지 않은 지도자
2015년 11월 26일
김 알 중 (조선일보에 댓글로 쓴 글)
조갑제는 글을 잘 쓴다. 참 잘 쓴다. 그는 글로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고,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이 글을 읽으니, 이제 이 세상을 떠난 김영삼은 내가 생각해오던 바로 그 김영삼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구두굽을 높이 달고 멋 부리면서 박정희를 심하고 물고 뜯던 그 사람이 아니다.
이 글에 따르면, 김영삼은 구속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박정희를 악 그 자체로 보고 악은 반드시 망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죽음도 그가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라. 그는 박정희를 참으로 열심히 물고 뜯고 비판했다. 그의 딸까지 칠푼이라고 심한 욕을 해댔다. 도대체 김영삼은 어디에서 힘을 얻어서 감옥 것도 즐거워 하고 죽음도 두렵지 않은 채 박정희에게 그렇게 열심히 대들었을까? 그에게 누가 그런 끈질긴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김영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듯이 교회 장로다. 조갑제의 다른 그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영삼은 구약성경 이사야서 41장 10절과 시편 121편을 좋아했고, 그 곳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었다. 위로도 받았다. 그가 연금 당해서 세상에 나갈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찾아올 수 없었을 때, 김영삼은 그의 아내와 단 둘이 찬송하고 기도했다. 이 인터뷰를 읽고 나는 김영삼을 단지 박정희의 대적자로만 본 내가 미안했다. 40일 금식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까닥하면 죽는다. 김영삼은 박정희와 싸위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40일 굶었다. 이 글을 읽는 정치인들, 40일 굶는 것을 결코 흉내 내지 말라. 죽는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다. 모두 66권이다. 한글로 160만 자로 구성되어 있다. 김영삼이 힘과 용기를 얻고 악은 반드시 망한다는 확신을 얻은 구약 성경 이사야서 41장 10절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구약성경 시편 121편도 여기에 적어 본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주님께서는 내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 너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지치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네가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실것이다.” (대한 성서공회가 발행한 성경전서 표준 새변역 개정판에서 인용함). 성경을 길게 인용했는데, 믿지 않은 사람들도 이 글을 읽으면 무엇인가 마음에 오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김영삼이 생애의 가장 어려울 때 아무도 없이 아내와 함께 둘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를 함부로 욕할 수만 없을 것이다.
종교가 도대체 무엇일까? 한 사냥꾼이 사냥을 나갈 때, 그는 총을 어깨에 메고 실탄을 허리에 차고 잘 훈련된 한 사냥개를 데리고 나간다. 총을 들고 이 산으로 달리고 저 산으로 달리는 사냥꾼을 따라 이 사냥개도 신이 나고 힘이 난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신나게 사냥을 한다.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사냥개는 갑자기 호랑이를 만난다. 이 때 개가 도망갈까? 주인의 뒤에 숨어서 벌벌 떨까? 전문 사냥꾼에 따르면 아니다. 그게 아니다. 사냥꾼이 가만히 서 있어도 개는 호랑이와 싸워서 호랑이를 이긴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사냥개는 총을 가지고 있는 주인인 사냥꾼의 능력을 믿고 있어서 그 자신이 호랑이와 싸워서 위험하게 되면 주인이 호랑이를 쏘아서 자신을 구할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에 호랑이와 싸워서 결코 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무엇이 사냥개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나? 그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그를 용감하게 한 것이 아닐까? 눈치 빠른 분들은 내가 사냥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종교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눈치챘을 것이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사냥개를 인간으로 생각해보라. 사냥꾼을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옥황상제) 이라고 생각해보라.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 (예수님)을 총을 든, 산 생명을 죽이는 것을 하나의 스포츠로 생각하는 사냥꾼에 비유한 것은 큰 불경죄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종교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 일 뿐이다. 믿는 자들은 일생 생활에서 그들의 하느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이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돕는다고 믿는다. 총든 사냥꾼이 그의 개를 보호하듯이 말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믿는 자들은 이 생에서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해서 절에 다니고 교회에 다니지는 않는다. 영원한 극락과 천국을 가기 위해 절에 가고 교회에 간다.
김영삼은 박정희와의 싸움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뒤에는 하느님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 장준하 등도 박정희를 심하게 비판했는데, 그들의 뒤에는 하느님이 버티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버티고 있는 하느님이 있기 때문에 강하고 무섭다. 지금 절의 스님도 무서운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의 힘도 그 나름대로의 믿음 때문일 것이다.
김영삼은 어디에서 힘과 용가를 얻었을까? 그는 그의 종교에서 얻었다고 위에서 나는 말했다. 또 하나 있다. 김영삼의 자존심, 자기 체면도 한 몫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영삼은 늘 그가 그의 기가 세대고 말해왔는데, 김일성도 자기의 기에 눌려 죽었다고 했고,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고서도 그를 그의 강한 기로 눌렀다고 했다. 경희대학교 서정범 교수가 쓴 한국무당열전에 따르면, 한국의 한 무당은 사람들의 미간(부처님 상의 눈썹과 눈썹 사이)을 보면 그 곳에 그 사람의 기가 디디털 숫자처럼 볼수 있는 무당이 있다. 그 무당은 사람들의 기가 1에서 12까자 나타난다고 한다. 김영삼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김영삼은 아마 최고 등급인 12가 될 것이다. 김영삼은 실제 박정희를 조금도 무서워 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들은 참 좋은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을 자기 집 개처럼 욕하는데, 아무나 대통령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잘난 이회창이 대통령을 못하는 것을 보라. 나는 그 사람을 정말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대통령 못한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자기 체면에 관해 이야기 하고 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해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오물을 그들의 머리에 퍼부운 그는, 성경이 추잡스럽고 더러워서, 특히 신약성경이 불결해서 장갑을 끼지 않고는 그것을 만질 수 없다고 말한 그 니체가 14세때 처음으로 자서전을 섰다. 그 자서전의 제목이 거창하였다. “나는 위대하다”였다. 그의 나이 44세 때 자서전을 또 썼다. 그 책의 제목이 “이 사람을 보라”였다. 그 책의 목차는 이렇다. “나는 왜 현명한가?, 나는 왜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쓰나?” 등이다. 진심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으나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니체의 이러한 자기 체면이 그를 세계 역사책에 그의 이름을 올린 것으로 정신과 의사들을 지적한다.
나는 김영삼이 그의 공부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는 말을 옛적에 들었을 때, 니체의 말들을 생각했다. 김영삼도 니체처럼 자기 체면에 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뇌 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강령한 자기 최면과 자기 암시는 어떤 사람의 목표달성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어떤 목표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 뇌가 우리의 몸이 그곳으로 가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의 공부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공부한 한 중학교 학생은 실제 대통령이 되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 나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자는 천국간다고 기록돼있다.
조갑제의 글을 읽고 김영삼을 박정희을 대적한 사람으로만 기억했던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미안해 하면서 이 글을 썼다. 조갑제는 글을 잘 쓴다. 참 잘 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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