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원장 자승스님은 하야하라고 권했다고? 아니다!
2016년 11월 10일 김 일중씀
(조갑제닷컴의 회원토론방에 쓴 글)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스님이 박대통령을 만났을 때 인용한 게송, 즉, 수목등도화(樹木等到花) 사재능결과(謝才能結果) 강수류도사(江水流到舍) 강재능입해(江才能入海)’ 에 대해 조갑제 닷컴의 회원 한 분(夷彦)이 글을 썼다. 그는 게송을 한겨레신문 기자는 ‘박 대통령이 현재의 자리와 권력에 연연하지 않아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는 뜻으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나는 자승스님이 인용한 게송(偈頌)이 이렇게 들린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통령을 위로 하는 소리로 들린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현 사태에 대해 신속하게 대처하셨습니다. 결과는 두고 보십시다. 만유(萬有)는 인연(因緣) 따라 흘러갑니다. 하야는 하고 싶어도 못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불법(佛法)입니다.’ 라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지도 몰라도 불타는 세상만사 (만유(萬有))를 강물에 흘러가는 한 잎의 나무 잎으로 본다.
그러면 자승스님이 인용한 그 게송을 이렇게 세 사람이 서로 다르게 해석할까? 바꾸어 말하면, 최 순실 사태를 보는 눈이 좌파와 우파의 눈이 왜 그렇게 다를까에 대해, 나의 경험을 통해 그 이유를 밝혀 볼가 한다. 글이 좀 길다.
내가 말년에 근무했던 회사 뒤에는 산이 있었다. 삼태기 같은 이 산이 회사를 감싸고 있었다. 이 산에는 유난히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다. 이 아카시아 꽃들이, 5월이면, 장관을 이루었다. 감미롭고 향긋한 아카시아 꽃향기와 주위의 싱그러운 신록이 회사의 주변을 극락국토 (極樂國土)로 만들었다. 이 5월의 어느 날, 나의 회사 사장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 법당에서 부처님께 예배하면, 어떤 때는 부처님이 환하게 웃으시지요”라고. 사장은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신도회 회장 직무대행을 지내신 분으로 포교사 (布敎師)였다. 이 사장이 예불을 하면, 부처가, 청동 불상이 어떤 때는 환하게 웃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었던 그 때, 나는 불상이 웃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도 법당에서 웃는 부처를 난생 처음으로 보았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구룡사 (九龍寺)에서였다. 이 날이 나에게는 기쁜 날이라서, 지금도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1993년 9월 12일 오후 두 시경이었다. 그 날 나는 엷게 웃는 부처를 본 조용한 기쁨 때문에, 법당에 오래 앉아 있었다.
구룡사 (九龍寺) 만불전(萬佛殿)에는 일곱 분의 앉아있는 큰 부처와 사방 벽에 일만 (一萬) 분의 작은 부처가 있다. 큰 부처는 보승여래불, 약사여래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여래불, 아미타불, 부동존여래불인데, 석가여래만 웃지 않고, 여섯 부처가 나를 보고 잔잔하게 웃었다.
이들 큰 부처와 함께 나무로 조각된 작은 두 분의 관세음보살이 있었는데, 이 두 보살은 웃음을 애써 참는 것처럼 입의 양 꼬리를 많이 올린 상태로 웃었다. 왜 부처님이 웃었을까 골똘이 생각하면서, 나는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부처들을 일일이 바라보았다. 방향을 바꾸어 바라보아도 여전히 부처들은 웃고 있었다.
법당에 앉아 있는 불상이 웃었다고 하면 필경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듣기 쉽다. 그러나 불상이 웃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들의 마음의 차이에 따라서 세계가 변한다”는 유식불교 (唯識佛敎)의 이론(理論)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작은 어려움인데도 아주 크게 괴로워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반면, 아주 큰 괴로움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잘 넘기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이는 유식불교의 실상(實相)과 관련된 일이다.
“곰보도 보조개”란 말이 있다. 갑돌 이는 갑순 이를 사랑한다. 그런데, 갑순 이는 곰보다. 그러나 갑돌 이는 갑순 이의 곰보를 곰보로 보지 못하고 보조개로 본다. 갑돌 이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이 곰보를 보조개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이 다르면, 같은 사물도 서로 다르게 본다. 갑돌이 에게는 애초에 곰보는 없고, 보조개만 있다. 불교는 모든 중생이 갑돌이 저럼 모든 것을 잘 못 보고,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고 가르친다. 본래 이 몸도 없는 것인데,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한다.
잘 못 보고, 다르게 보는 예를 더 들어 본다. “중이 미우면, 가사(袈裟: 스님이 입는 옷)까지 밉다”는 말이 그것이다. 스님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갖고 있으면, 스님이 입는 옷까지 밉게 보인다. 가사는 천 조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별로 미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스님이 미우면 가사까지 미운 것이다. 나는 나의 아내가, 묽은 똥을 싸는 젖먹이 아들의 똥을 손으로 찍어 맛보는 것을 본적이 있다. 설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한 것이다. 나는 이를 보고 어머니들의 모성애를 크게 찬탄했는데, 나의 아내에게 있어 아들의 묽은 똥은 그저 똥이 아니고, 맛 볼 수 있는 음식 같은 것이었다.
흔히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할까? 절에 가면 마음이 부처란 말을 듣는다. 우주는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말도 듣는다. 내가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말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마음을 한자 (漢字)로 바꾸면, 의식(意識)이다. 죽은 사람을 보고 우리는 의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 의식이 마음이다. 수술하려고 마취를 시켜놓으면, 어떤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조용기 목사를 병원에서 마취시키고 위내시경 검사를 했을 때 그는 평상시와 같이 설교를 했다는 조선일보의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욕을 하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마음이 하는 일이다. 달나라에 인간이 갔다 온 것도 마음이 한 짓이다. 의식 (意識)이 한 짓이다. 이 의식은 우리가 죽어도 소멸하지 않는 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사후(死後) 세계를 말하는 종교는 이 의식의 불멸을 믿는 것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여덟 가지 식(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 것이 저 유명한 8식(八識)인데, 스님의 설법을 들은 이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안식 (眼識),이식 (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등 오식(五識)과 의식(意識)인 6식, 말라식, 아뢰야식, 암말라식(識)등 제7식, 제8식이 그 것들이다. 우리들이 보통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맛고, 맛보고, 촉각으로 느끼는 것과 의식을 포함한 것이다.
꽃을 보는 것도 마음이고, 음악을 듣는 것도 마음이다.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마음이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다. 참선을 하다 보면, 천 명의 부처가 나타나기도 하고, 귀신이 보이기도 하는 마경(魔境)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도 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나 무생물까지도 마음을 가지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마음의 차이에 따라서 세계가 변한다”는 말은 (불교의 가르침은) 더 인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불교경전에 있는 일수 사견 (一水 四見 : 먹고 마시는 물을 4가지 다른 것으로 본다) 이란 비유를 여기에 인용한다. 세친 (世觀, 세친으로도 읽고, 세관으로도 읽는다.) 보살이 쓴 구사론 (俱舍論)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경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물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물이다. 그러나 이 물이 물고기에게는 그가 사는 집으로 보이고, 하늘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보석으로 보이고, 지옥 중생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각각의 중생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물이 각각 다른 물질로 보인 것이다.
각자의 마음의 차이에 따라서, 그 차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맛이 나고, 다르게 냄새 나고, 다르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된다는 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고, 절망이 있다. 가을 달이 슬프게 보일 때, 기쁘게 보려고 해도 안 되지 않던가.
갑돌 이가 갑순 이의 보조개를 곰보로 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곰보로 보이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마음의 노예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노예인 것을 알면, 큰 슬픔을 작은 슬픔으로 보낼 수 있고, 큰 어려움도, 작은 어려움처럼 극복할 수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우리 주변사람들도 덜 미워할 수가 있다.
구룡사에서 웃는 부처를 본 후에 한 일주일 지난 어느 새벽에 나는 다시 그 절에 갔다. 그러나 그 새벽에 본 부처들은 내가 9월12일에 본 그 웃던 부처들이 아니었다. 관세음보살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두 분 부처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부처는 평소의 미소 띤 그대로였다.
뒤로 물러나 먼데서 부처를 바라보니, 모두 무뚝뚝하게 앉아있었다. 어느 교회의 목사의 비꼬는 말처럼 “사람들의 기도도 못 알아듣는 듯” 청동 불상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웃는 부처를 만든 것도 나의 마음이었고, 웃지 않는 청동 불상을 만든 것도 나의 마음이었다. 극락과 지옥이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다.
자, 여기까지 글을 읽은 분은 세상을 보는 눈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불교를 끌어들였다. 좌파의 논객과 우파의 논객의 주장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박대통령의 하야에 대한 의견도 달라야 한다. 우파의 논객이 좌파의 논객의 주장이 틀렸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반대는 어떨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흰 것이라고 이무리 주장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면 박대통령의 하야란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좌파와 우파는 서로 싸워야 한다. 조갑제 대표를 지지하는 우리들은 좌파와 싸워야 한다. 박대통령은 좌파와의 결연한 싸울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우파는 진군나팔을 불어야 한다. 함성을 질러야 한다. 지금은 반격을 할 때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정치는 싸움이다. 그러나 증오를 가지고 싸우질 말고 공의(公義)와 사랑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자승스님이 하야를 권했다고? 천만에! 천만에!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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