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칼럼

홍준표는 운명에게 싸움을 걸가?

김일중 2020. 3. 11. 07:23

홍준표는 운명에 맞서지 말고 웃으면서 피하라.

(조갑제 닷컴 회원토록방에 올린 글

김 일 중,  2030년 3월 11일

우리말에 동아리란 단어가 있다. 영어로 이 단어를 표현하면 party가 될 듯하다. 동아사전은 이 동아리를 “(같은 뜻을 가지고) 패를 이루는 무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치는 동아리간의 싸움이다. 패거리 간의 싸움이다. 그래서 4월 총선은 자유민주주의의 동아리(우두머리는 황교안)와 인민민주주의의 동아리(우두머리는 문재인) 간의 싸움이다. 정치는 경기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는 일대 일로 싸우는 권투경기 같은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축구와 같은 단체경기이다.

황교안은 이번 축구경기에 출전할 선수를 선발 중이다. 그는 이번 축구경기에서 이겨야 권투시합에 출전할 수 있다. 그는 선수 선발권을 김형오에게 맡겼다. 그는 힘 센 선수를 골라야 하고, 또 고른 선수를 유권자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 힘센 선수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또 뽑힌 선수들은 유권자들이 좋아해야 한다. 선택권이 있는 유권자를 기쁘게 할 선수가 어디 그리 흔하냐? 김형오는 지금 연산군 때의 채홍준사(彩虹駿使)의 일을 하고 있다. 미인을 잘못 뽑으면 그가 죽는다.

정치는 개인의 싸움이면서 그가 속한 동아리간의 싸움이다. 싸움에서 진 개인이나 동아리는 이긴 개인이나 동아리에게 일정 기간 동안은 승자의 권리와 권한은 인정해야 한다. 패자는 승자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 김형오가 홍준표를 선수 선발에서 제외한 것은 김형오와의 싸움에서 홍준표가 패자라는 의미이고, 황교안의 동아리가 홍준표의 동아리를 이겼다는 의미이다.

홍준표는 이런 의미에서 김형오와의 싸움에서 패자가 되었고 그래서 공천에서 배제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김형오에게 싫어도, 죽기보다 싫어도 그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싸움을 좋아하고, 싸움에 능한 사람이라 그는 어제의 기자회견에서 김형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출마를 선언할 줄 알았다. 나는 그가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지지자다) 그래서 그가 출마를 선언하면 그를 응원하는 글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웬 일인가? 그가 탈당을 한다면 언제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그 당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일이 수두룩하다. 공천받지 못한 이들은 어느 하나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김형오에게 칼을 맞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아하! 운명이 나를 보고 때를 기다리라고 하네.”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낙선하면 그것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인민민주주의의 동아리에 헌신하는 악행(惡行)이 된다.

김형오와의 싸움에서 진 이들은, 인간인 김형오에게 진 것이 아니고 운명(運命)에게 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될 것이다. 동아 국어사전은 운명을 이렇게 정의 한다 :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 또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길흉화복. 타고난 운수나 수명”. 운명과 겨루어 이긴 사람은 많지 않다. 운명이 여신(女神)이라고 함부로 덤벼서는 안 된다.

홍준표가 이번에는 김형오의 철퇴를 피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말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몽둥이를 들고 덤비는 운명의 여신과 싸우지 말고 웃으면서 피하면 어떨까? 그들이 김형오와의 싸움에서 진 책임을 다하면 어떨까? 그리고 때를 기다리면 어떨까? 너도나도 무소속 출마를 해서 문재인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