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학폭’ (學暴)
(고교 동창회 대화방에 올린 글)
2023년 8월 25일
김일중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아름다운 ‘학폭’ (學暴:학교 폭력)이었다. 내가 고교 2학년 때. 미국 병사들이 우리 학교와 담장을 함께 하고 주둔했다. 그들이 그 철조망 울타리에 무척 밝은 전등을 달아서 7월의 무더운 여름 밤에는 그 환한 전등불 밑에서 공부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곳에서 학우들과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밤, 8시경에 같은 반 친구 김환영 (가명)이 나타나서 나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야, 너 성냥이나 라이터 있냐?” “나, 담배 안 피우는데”, 나의 대답. “내가 대전여고 애를 학교에 데리고 와서 따먹었다, 그 계집애가 처녀가 아닌 것 같아, 교실에 가서 그가 흘린 피가 있는지 확인해야 해, 불이 있어야지”, 위 급우의 말이다.
나는 학교 폭력이란 단어를 만날 때마다 위의 그 동기생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지금 나 모르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때 그를 두고 친구들은 ‘깡패’라고 불렀다. 그는 나를 가끔 ‘이 촌놈의 새끼’라고 조롱했다. 내 배를 주먹으로 꾹꾹 찔렀다. 내 바로 뒷좌석이 그의 자리였는데, 공부 중에도 심심하면 내 등을 주먹으로 아프지는 않게 쳤다. 어떤 때는 고무를 빌려달라 했다. 또 연필을 깎아달라고 했다. 빌려는 주었으나 깎아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와 맞붙어 싸우면 질 것 같지 않아 덤비면 한 번 붙으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권투를 배워야겠다,” 나는 실제 권투를 배우려고 도장에 갔다. 그러나 교습비 때문에 등록은 못 했다. 그는 내가 권투를 배워야 하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지, 가끔 나에게 “너 요새 권투를 배우냐?”고 물었다. “돈이 없어 운동하러 못 다닌다.” 이것이 그에 대한 나의 계속된 답변. 그는 장난스럽게 나를 조롱했으나 때리지는 않았다. 그는 매우 더웠던 그날 밤에 그 여학생의 순결한 피를 눈으로 확인했을까? 그 여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졸업 후 나는 그 ‘깡패’를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우리 동기생 중에 김호병 (가명)이 있다. 그 친구도 나를 가끔 “이 촌놈의 새끼”라고 모욕하고 그가 내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를 두고 친구들이 그도 ‘깡패’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김호병을 호위한다는 소문이 돈 김지랄 (가명)도 까닭 없이 내게 시비를 걸고 비웃었다. 나는 3학년 때, 이영일 (실명)이 나를 얼띤 놈이라고 불렀고, 이 별명이 참 좋다고 송인목 (실명)이 맞장구를 친 양순한 학생이었다. 나는 김지랄과 결국 한 번 붙었다. 그와 싸우러 운동장에 나갈 때, ‘깡패’ 김호병이 그의 동아리 여덟 명과 함께 우리 둘을 뒤따랐다. 나중에 안 일인데 김지랄은 깁호병의 동아리의 부두목이었다. 그와 내가 시비한 적이 있는데 그 일로 깁호병은 나를 미워했다.
김호병의 일당 아홉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와 김지랄은 더운 여름에 방과 후에 넓은 운동장에서 한 판 겨루었다. 그런데 승부가 안 났다. 그러자 그 패거리가 싸움을 말렸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학교 창고로 끌고 가서 두 사람이 벽에 내 두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르고 한 사람이 내 배를 쳤다. 때리기는 했으나 세게 치지는 않았다. 그때 한 반의 김범명 (실명)이 나타났다. 그가 나를 구했다.
지금 생각하니, 나에게 ‘학폭’을 한 김호병과 김환영은 나보다 훨씬 조숙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요새 말로 학원 폭력은 했으나 사악한 폭력은 자제했다. 나는 고교 때 남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김호병은 자기 동아리를 만들어 남을 지배하려는 연습을 시작했다. 고교 때에 여학생을 꼬여 그의 품에 안은 김환영을 생각해보라. 그의 도덕성을 눈감아 주면, 그의 암컷을 호리는 놀라운 재주를 칭찬해야 한다. 그는 우리 동기들이 회사의 부장으로 일할 때, 부사장으로 쌩쌩 날렸다. 그러나 그는 그 직책을 끝으로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김호병은 인물이 잘났다. 당당했다. 그에게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일찍 타계했단다. 김환영이는 턱이 삼각형이었고, 야위었으며, 못생겼다, 그러나 그의 눈은 빛났고 행동은 민첩했다. 친구들은 그가 영특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통령이 된 정치인의 자금 담당 비서를 했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른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게 보인다. 기쁨도 슬픔도 미움도 노래기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 사람들의 표현대로 내게 학폭을 한 김환영, 김호병이 밉지 않다. 나는 지금 실지로 육탄전을 벌였던 김지랄의 실명(實名)을 기억하지 못한다. 김호병을 따르던 동기생들의 이름과 얼굴도 다 잊었다. 하긴 1959년의 일이니 어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으랴. 내 나이 67세 때, 나를 구했던 김범명을 졸업 후 처음 만났다. 그 때, 내가 그에게 그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를 구한 그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 모두는 내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알고 싶다. 다들 건강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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